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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Mar 08.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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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린 남자와 여자가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며 걷고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옷과 가방이 원래보다 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와 잘못된 소통으로 두 블록이나 앞서 내린 이들은 목적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크리스마스를 3주 남겨둔 거리는 찬란한 조명으로 가득했다. 몇 시간 전, 2번의 경유 끝에 파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옷이 젖는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여유로워 보였다. 피곤할 법도 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즐겼다. 여자는 근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방수 재킷을 걸친 사람들이 소란스레 스쳐갔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10여 미터 앞 호텔이 보였다. 호텔 입구에 서있는 청년을 향해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한 손으로 원통 모자를 누른 청년이 우산을 쥐고 뛰어왔다.


“봉수와!”


황금색 곱슬머리 청년이 우산을 받쳐 들고 여자의 짐을 받았다. 그는 두 사람을 호텔 로비로 안내했다. 투숙절차를 마치고 열쇠 2개를 받아 든 남녀는 자신들이 들고 온 가방과 백팩이 새장 같은 수레에 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레를 미는 청년은 피부색이 짙었다. 역시 원통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람 세 명과 수레까지 들어찬 승강기 안은 좁았다. 원통 모자 청년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승강기를 나온 수레가 두 사람이 묵게 될 객실 근처에서 멈춰 섰다.


“메르시!”


남자 말에 수레를 밀고 온 청년이 다시 하얀 이를 드러냈다.

 

호텔에 도착하고 이틀 동안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삼 일째가 되자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울적했던 여자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남자와 여자는 파리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남자는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꿈만 같았다. 오랜 비행을 불평했지만 이젠 그 비행이 고마웠다. 언젠가부터 남자 주머니 속엔 자줏빛 우단으로 덮인 상자가 들어있었다. 여차하면 그 작은 보석함을 열고 여자 앞에 무릎 꿇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짱구 머리가 합류하면서 남자가 노리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셋이 된 이들은 파리 시내에 있는 레지던스로 숙소를 옮겼다. 큰 거실과 방이 셋 딸린 이곳은 창 밖으로 에펠탑이 보였다.


“왜 하필 파리로 정한 거야? 상황이 상황이라 아무 말 못 했는데……”

나오미가 창 밖을 보는 칠오에게 말했다.


젠장! 나오미가 정한 거 아니었어? 도피행이라면 가까운 필리핀이 더 적격이잖아!”

응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칠오는 창 밖을 가리켰다.


“난 항상 에펠탑을 보고 싶었다고.”

나오미와 응천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저녁 모처럼 모인 세 사람은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냈다. 응천은 술의 취기를 빌려 수시로 칠오를 두고 비꼬는 농담을 던졌다. 나오미까지 칠오를 안쓰럽게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칠오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각자 머릿속에선 자신들이 원하는 미래를 그렸다. 창 밖으로 에펠탑이 번쩍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12월 10일, 아침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칠오와 거실에서 TV를 시청하던 나오미와 응천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


“어떻게 된 거야?”

칠오를 보는 나오미 눈빛이 떨렸다. TV 화면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도 모두 떨고 있었다. TV는 몇 시간 전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어. 칩이 폭발할 줄은 몰랐어.”

그때까지 외출복 차림으로 서 있던 칠오가 말했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놀라거나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모습이 나오미를 더 자극했다.


“뭐?”

눈으로 본 영상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넋이 반쯤 나간 표정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칠오에게 달려들었다.


“나오미, 진정해!”

응천이 나오미를 칠오에게서 떼어내 소파에 앉혔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응천은 칠오에게 눈짓을 보냈다. 칠오는 꿈쩍 하지 않았다. 응천이 몇 번이나 인상을 써가며 소리치자 그제야 다시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 밖에서도 나오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칠오는 그날 밤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나오미와 응천은 그때까지도 거실 소파에 있었다. 응천이 고개를 돌려 칠오를 힐끔 쳐다본 다음 다시 나오미를 바라보았다. 나오미는 칠오를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눈물은 더 이상 흘리지 않았지만 눈이 많이 부어있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어, 아이들까지도! 이건 예상 못했어? 어떡해, 이제 우린 어떡하냐고?”

나오미가 고개 숙인 채 말했다. 그녀 목소리는 투정하는 아이 같았다.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는 아침과 다르게 힘이 빠져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잖아. 정부가 우리에게 잘못을 덮어 씌우려 했어. 칩이 사람들 생각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부가 아는데, 우릴 가만 놔두겠어? 난 단지 칩을 먹통으로 만들려 했을 뿐이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당했을 거란 걸 알잖아! 그 과정에 칩이 폭발한 거야.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어! 그리고 이젠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린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고개 숙인 나오미는 더 이상 칠오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만 했다. 사이사이 내쉬는 한숨이 그녀를 더 애처로워 보이게 했다.


나오미 낯빛은 파리에 처음 도착한 날로 돌아갔다. 우울한 낯빛으로 하루 대부분을 자신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잠깐 나온 거실에서 어쩌다 칠오와 마주칠 때면 그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칠오가 나오미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음을 안 응천이 나섰다.


“당분간 서로 얼굴 보지 않는 게 좋겠어. 이야기할 게 있음 전화나 메일로 하자고.”

응천의 말을 잠자코 듣던 칠오는 그날 오후 늦게 자신의 짐을 챙겨 레지던스를 떠났다.

 

응천은 나오미에게 자상한 아빠처럼 굴었다. 방에만 처박혀 있는 그녀를 어떻게든 빼내려 했다. 거부하는 그녀를 억지로라도 끌고 밖으로 데려갔다. 처음 나오미는 범죄자처럼 지나치는 사람들 눈을 피했다. 응천은 나오미를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하는데 힘썼다. 주변을 가볍게 걷고 오기만 해도 기분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은 나오미 또한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자신 또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죄책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 사건의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짓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제목도 발신자도 없었다. 나오미가 메일을 열었을 때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사진 속 남자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남자가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웃고 있었다. 눈빛이 선해 보였다. 나오미는 그가 누구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한때 머릿속에서 그토록 지우려 했던 그 남자였다. 얼굴이 더 수척하고 훨씬 나이 들었지만 아빠라는 남자가 분명했다.


생 라파엘 요양원 162호, 낭트


사진 밑에 달랑 한 줄이 적혀있었다.

나오미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죄책감과 우울감에서 막 벗어나려는 그녀를 또 다른 격정이 사로잡았다. 아빠 사진을 봤을 때 맨 처음 느낀 감정은 뜻밖에도 반가움과 설렘이었다. 하지만 금세 그 감정을 제지하는 감정이 나타났다. 증오와 원망! 그날 밤 나오미 정신은 정확하게 양분되어 싸움을 벌였다. 한쪽에선 반가움과 설렘이 호기심을 대동하고 등장했고 다른 한쪽에선 증오와 원망이 그녀의 우유부단함을 질책하며 칼을 휘둘러댔다.


‘우릴 버리고 떠날 땐 언제고, 엄마가 쓸쓸히 죽어갈 때 당신은 어디 있었지? 지금까지 뭘 하다가 왜 이제야 나를 찾는 거야? 꿈에서조차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았지, 당신은.’


‘사진은 누가 보냈을까? 떠난 이유라도 들어봐야지 않을까?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나를 조금은 사랑할까?’


야곱이 천사와 밤새 씨름하듯 나오미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와 싸웠다. 처절한 싸움은 새벽이 찾아올 때쯤에야 끝이 났다.


“나오미! 아빠는 좋은 분이란다. 아빠를 혼내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

화창한 어느 가을날 밤이었다. 엄마는 어린 나오미를 따뜻한 눈빛으로 데워주었다. 그때 느낀 온기는 여전히 따뜻했다. 불쌍한 엄마 생각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끝없이 흘렀다. 결국 엄마가 이 싸움의 승부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아침이 왔을 때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어느 때보다 맑았다. 환한 주변과 함께 자신의 기분도 덩달아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햇살이 창으로 쏟아질 때쯤엔 엄청난 기대감이 밀려왔다.


그날 아침 나오미는 자신의 계획을 응천에게 이야기했다. 응천은 기꺼이 함께 하려 했다. 처음엔 그녀 홀로 모든 상황을 감당하려 했다. 하지만 우려하는 응천이 절대 자신을 혼자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그의 동행을 만류하지 않았다. 응천은 자신의 아빠를 만나는 것처럼 모든 준비에 더 적극적이었다. 응천이 어느 때보다 고마웠다. 두 사람은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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