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다큐멘터리 개그우먼> 그리고 SBS <선미네 비디오가게>를 보고
나만을 위한 비디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이다. <SBS 스페셜>에서 파일럿 프로그램 <선미네 비디오가게>를 선보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아카이브 영상으로 구성해 하나의 비디오에 담는다는 기획이다. 첫 회 게스트로 나온 박미선은 이 프로그램이 시청자에게 줄 수 있는 감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게스트였다.
33년의 기록. 누군가의 인생을 보여준다는 건 거창한 일이다. '선미네 비디오'는 박미선의 54년 인생 중 방송인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두었다. 1988년 데뷔 후 쭉 자신의 커리어를 쌓은 사람. 그녀의 33년 발자취는 지금 우리가 박미선을 대표적인 방송인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활동들의 기록이기도 하고, '여성', '개그우먼'으로서 가졌던 고민의 이면이기도 하다.
"그건 말이죠. 여자를 무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 선입견이라고요."라고 방송에서 말하는 '개성 있는' 개그우먼의 탄생. 결혼 소식에 앞으로 방송 활동은 어렵지 않겠냐고 쏟아지는 질문. 개그맨으로서 본인도 웃길 자신이 있지만 <순풍 산부인과>에서 '지명의 딸' '영규의 아내' '미달이 엄마'로서 다른 인물들을 받쳐줘야 했던 설움. 박미선은 두 명의 아이를 낳고 휴식을 가진 두 달 이외에 33년 동안 한 번도 방송을 멈추지 않았다. 트렌드가 변하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방송계의 변화 속 그녀가 쉬지 않고 보낸 시간에는 개그맨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뿐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견뎌야 했던 시련도 함께 담겨있다.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 중 하나인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찾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비정규직 은행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다이어트가 필요한 어린 여자애였으며, (...) 누군가에게는 감정도, 생각도, 느낌도, 자기만의 언어도 없는, 반격할 힘도 없는 인형이었던' 희원은 일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들어간다. 그리고 누구보다 똑똑하고 강해 보이는 강사의 수업을 좋아한다.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그 수업에서 희원은 설렘을 느낀다. 강사는 희원에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이었다.
희원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학생은 그 강사의 수업을 좋아했다. 하지만 강사를 무례하게 대하는 몇몇의 학생들이 있었다. 희원은 선생님이 젊은 여자 강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 공부를 계속하던 희원은 어느 순간부터 그 강사의 글이나 번역서를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너구나."
신입 공채에서 뽑힌 개그맨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박나래가 들은 말이라고 한다. KBS 예능 피디는 이런 압축적인 표현을 이렇게 설명한다.
"뚱뚱한 여성, 못생긴 여성, 예쁜 여성이면 웃음을 만들기 쉬워지거든요."
KBS의 <개그콘서트>가 1050부작을 끝으로 폐지됐다. 개그 프로그램은 그동안 시청자들에게 많은 웃음을 주었지만 점점 방송은 웃음을 '개그'보다는 '예능'으로 풀어내고 있다. 트렌드의 변화에 개그 프로그램은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개그우먼'들에게는 개그맨이 아닌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위기가 있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외모의 소재에 갇혀야만 했던 그녀들은 2000년대 버라이어티 예능으로의 전환에서도 배제되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1박 2일>, <무한도전> 등의 버라이어티는 남성 방송인들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런 예능 속 여성은 '모닝엔젤' 등의 배우나 아이돌로 등장한다.
개그우먼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방송계에서 그녀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걸 찾았다. 이영자의 '연예대상' 대상 수상 이후 박나래가 대상을 수상했다. 팟캐스트 김숙 송은이의 <비밀보장>, 셀럽파이브, 둘째이모 김다비 활동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뜨겁다.
소설에서 희원이 찾은 빛은 아주 희미했다. 박미선이 걸어온 33년의 길도 항상 빛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미해도 그건 빛이었다. 지금 그녀를 비롯해 수많은 개그우먼들은 스스로 빛내고 있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빛들이 아직도 막막하게 가려진 곳들을 구석구석 비춰 어둠을 밝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