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심심하면 심리테스트나 적성 검사를 한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우수수 쏟아지니, 과연 얼마나 전문적이고 신빙성이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시간 때우기에는 그만이다. 그중에서도 MBTI 성격 유형 검사는 볼 때마다 한다. 전에 했을 때 어떤 답을 선택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분명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매번 ‘열정적인 중재자’ 혹은 ‘잔 다르크형’인 INFP가 나온다. INFP에는 INFP-A와 INFP-T가 있는데 이 둘의 차이는 모르겠다. 나는 늘 INFP-T이다. 조금 전에도 해봤는데(https://www.16personalities.com/ko ← 여기에서) 똑같이 나왔다.
INFP-T의 설명을 보면, ‘최악의 상황이나 악한 사람에게서도 좋은 면만을 바라보며 긍정적이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진정한 이상주의자’라고 하고, 이 중재자형에 속하는 유명인에는 셰익스피어와 톨킨, 워즈워스, 프로도 배긴스, e가 붙은 앤 등이 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나 톨킨 시절에 MBTI가 있었을 것 같진 않고 실존 인물이 아닌 프로도나 앤이 이 테스트를 받았을 리 없으니 황당무계한 소리지만, 한때 젊음을 바쳐가며 덕질했던 세계관을 만든 톨킨 님과 같은 유형이라니 영광스럽다.
저 사이트에서는 설명이 꽤 온화한데, 약간 적나라한 사이트에서 설명을 보면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 많다. 일단 INFP 유형 자체가 아싸에 이기적이며 남의 눈치를 보고 게으름뱅이란다. 이 무슨 막말이냐고, 절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주변에 적응 못 하는 아웃사이더이고 남한테 인정받기보다는 내가 만족하면 되는 이기적인 인간이며, 그런 주제에 자의식 과잉이라 남이 하는 말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너덜너덜하고 나무늘보가 사람이 된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게을러터졌다. 이러니 뭐라 받아칠 말이 없다. 엄청 소심하고 망상을 좋아하고 우유부단하며 약간 사회 부적응자 같은 성향이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INFP 유형이 많다고 한다. 문득 나는 별로 이상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아니, 없는 것 같은데 학창 시절 내내 특이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대학생 때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3년 넘게 받았던 적도 있다. 정작 그 오해를 나만 몰라서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났는지 모른다. 어차피 대학 시절에 알던 사람들은 한 명도 안 만나니 상관없지만.
선악 개념이 뚜렷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데, 이것도 맞는 게 오죽하면 엄마가 한의사한테 ‘얘는 악한 거나 나쁜 걸 치를 떨고 싫어하느라 자기 에너지를 무의미하게 소모한다’라고 상담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의사의 대답은, “열 체질은 원래 그래요. 불이 나면 도망가는 게 아니라 소화기 쥐고 진화 들어가는 게 열 체질이에요”였다. 요컨대 열 체질이며 INFP인 내가 불의를 보면 파르르 떨다 못해 혈압이 올라가 거품 무는 건 당연하다는 소리. 문제는 요즘 세상에 뒷목 잡을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인데, 글로 쓰면 내 속만 터지니 그만두자. 그나저나 이런 특징을 한 줄 한 줄 정독하면서 ‘맞아, 맞아. 내가 이래! 족집게네!’라고 반응하는 것 자체가 INFP의 특징인가 싶기도 하다.
갑자기 성격 유형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MBTI별 기도 유형을 보고 말 그대로 빵 터졌기 때문이다. INFP는 ‘주님, 부디 제가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낼 수 있’이라고 기도를 한단다. 저 짧은 기도 하나 못 끝내는 성향이라는 소리다. 그걸 보고 깔깔 웃으면서 속으로 매우 켕겼다. 이때까지 내가 꾸준히 해온 일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싶어서. 일단 브런치에 글 쓰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 않나.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아니, 어렵다. 글 쓰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 일기장에 지지고 볶고 장구 친다면 상관없지만 이건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이니까, 그것도 익명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올리는 것이니까 더 어렵다. 어렵다고 하면서 이런 이상한 글을 올리고 있으니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겠지만, 이 글도 나름 정제한다고 고민하면서 쓰고 있다. ‘브런치에 올리기 위한 글을 쓰는 자아’, ‘개인 블로그에 올리기 위한 글을 쓰는 자아’를 벗어던지고 글을 쓴다면 그 누구에게도 읽혀선 안 될 글이 나올 테니까. 성실하게 글을 올리지 못할 것을 알기에 브런치북을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시도한다고 결과가 따르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지금은 꾸준함과 담을 쌓은 성미인 나를 다독이고 이끌어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게 먼저일 것이다.
내 글쓰기는 일에 영향을 받는다. 일이 없으면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마구 솟구치는데, 일이 바쁘면 의욕은 있어도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번역이 좋아서 번역가가 된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몇 달간 일이 없어 세상에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일 때는 제법 열심히 글을 썼다. 기분이 바닥을 기는 시기에 써서 브런치에 올리지 못하고 노트북 하드디스크 안에 잠든 글도 꽤 많고, 하예 이야기도 우울함에 시달리면서 썼다. 지금은 일이 있는 덕분에 하예 이야기를 선뜻 잇지 못하고 있다. 가능하면 평생 친구 삼아 쓰고 싶은 이야기긴 한데, 우울하지 않을 때도 하예와 마주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갖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번역가 선생님이 ‘글을 계속 쓰면 언젠가 책을 내게 될 거예요’라고 말씀해주셨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만 나 자신을 매우 긍정적으로 믿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꾸준히 글을 쓰자. 나는 주님은 믿지 않으니 이렇게 기도할까? ‘부처님, 부디 제가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나저나 번역만큼은 질리지 않고 꾸준히 좋아하는 게 참 기특하다. 적성에 잘 맞는 꿈을 찾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