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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내음 Mar 28. 2016

첫 번째 편지

너의 첫인사

사랑하는 나의 딸, 도담이에게


도담아, 안녕?

어젯밤에도 잠결에 네가 부른 이름 '엄마'란다.

우리 딸과 늘 붙어 있다시피 하며 지금도 너와 충분히 많은 것을 나누고 있지만 엄마는 우리가 더 성장했을 때 더 많은 것을 나누기 위해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정했단다.

나중에 우리 딸이 글씨를 배우고 편지라는 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편지를 보며 '아 이런 일도 있었구나' 생각하며 엄마, 아빠와 이야기할 거리가 하나 더 늘길 바랄게.


생애 처음으로 너에게 쓰는 편지 내용으로는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네가 처음 세상이라는 곳에 네 존재를 알렸을 때를 기억해보며 엄마도 엄마라는 이름의 첫 순간을 기억해 보면 좋겠다 싶었어. 참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던 때여서 나도 기억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지만 하나하나 떠올려볼게.


아직 너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를 임신하는 순간에 대다수의 부모는 두 갈래의 길로 걸어왔을 거야.

그중 하나는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노력하며 임신의 그 순간을 기다려 온 부모, 그리고 또 하나는 특별한 계획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임신의 그 순간을 맞이한 부모.

엄마, 아빠는 그중 두 번째에 속한단다. 그래서 엄마는 그 첫 순간에 민망하게도 괴성을 질렀었지. 그것도 출근 전 화장실에서 아주 큰 소리로 "아악! 여보!" 이렇게 말이야.

아이가 생긴다는 건 인생의 방향 또한 아주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중요한 사건이 전혀 예측 없이 일어난다는 게 얼마나 놀랄 일이겠어. 그래서 엄마는 정말 크게 소리 질렀어. 지금 생각해도 민망할 정도로. 아빠는 어슴푸레한 새벽에 일어나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있었을 텐데 괴성에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


그 날, 엄마는 정신없이 출근을 했고 출근하자마자 누군가 쥐어준 PT 자료를 보며 뭐라 말하는지도 모른 채 월간회의에 나가서 부서의 새로운 서비스에 대해 이야기했지. 때마침 그 날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half-day off 였기에(엄마 회사에 이런 좋은 제도가 있었단다!) 정오가 되자마자 부지런히 퇴근을 해서 산부인과에 도착을 했어. 산부인과에 앉아 기다리는 순간에도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지?'라는 어색한 감정이 떠나질 않더구나. 간호사가 엄마의 이름을 불렀지. 초음파 검사라는 낯선 진료가 끝나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단다.


"축하합니다. 임신 6주 차네요. 아기집은 안정적으로 안착되었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나요? 보통 5주 이전에 다들 오시던데요."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아빠 말을 빌리자면 엄마는 반응이 느린 여자여서 임신에 대해서도 별생각 없이 나태하게 있다가 6주나 되어서야 병원을 갔었나봐. 그다음 의사 선생님과의 대화가 인상적이었지.


"저....... 근데 제가 계획 없이 아이를 임신해서,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인데, 엽산도 먹지 않았고요. 아이가 정상적으로 클 수 있을까요?"

"준비된 상태로 임신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조금 무안하면서도 어찌나 안심이 되었던지. 병원에서 나와 아빠에게 전화를 했고, 아빠는 엄마의 기분을 살피느라 무척이나 조심하면서도 임신했으니 조심해야 하는 것들을 그 짧은 통화에도 참 많이 얘기하더구나. 너희 아빠도 참 잔소리가 심해.


임신도 확인했으니 점심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순간 좀 슬퍼지더라. 이제 아무거나 먹지 말아야 하는 임산부의 길로 들어섰다 생각하니 그냥 슬프더라고. 뭐 그런 감정을 네가 아직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건 마치 네가 바나나를 엄청 먹고 싶은데 앞으로 열 달간 못 먹는다고 엄마가 막는다면 엄청 억울하고 슬픈 감정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하튼 엄마는 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뒤 설렁탕을 먹으러 갔어. 엄마는 원래 강인한 여자라 혼자 설렁탕을 먹는 게 슬픈 타입은 아니었는데 그 날은 설렁탕을 먹는데 너무 슬픈 거야. 아마 그 집 설렁탕이 그 날따라 맛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 저녁, 그리고 뒤따라 이어지던 주말에 엄마와 아빠는 무언가 끊임없이 상의하고 얘기를 나눴던 것 같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이가 생긴다는 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의미하니깐 우리에게도 많은 논의가 필요했지. 아하하하 모르겠다 싶다가도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되어 심란하기도 하고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생각하니 특별한 느낌도 들었지. 하지만 이제 와 고백하건대 이제 남들처럼 보편적인 아줌마의 삶으로 들어간다 생각하니 한 순간 맥없이 늙는 느낌도 없진 않았다고 인정할게. 대다수의 여자들은 아줌마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거든. 너도 아마 그럴 거야.


이토록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던 바빴던 주말이었기에 엄마는 너와의 첫 순간을 잊을 수 없지. 다른 엄마들처럼 임신을 위한 몸 만들기에도 노력하고 임신에 대한 정보도 미리 찾아보진 못했지만 엄마도 네가 엄마 몸속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안 뒤에는 얼마나 천천히 걸으려고 노력했는지 몰라. 누구보다도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엄마에게 공존의 대상이 생겼다는 건 일대의 혁명이었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는 얘기란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조심하려고 애썼다는 것 하나만 기억해줄래?


편지 쓰기 전에 깎아놓은 사과가 그새 색이 변했다. 첫 편지는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엄마는 오늘도 우리 도담이와의 열정 넘치는 하루를 위해 색이 더 변하기 전에 사과를 먹어야겠다.


도담아

너는 세상에 없던 우주였어. 어느 날 엄마 아빠에게 운명처럼 너라는 우주가 생겨났지.

그런데 그 우주는 기대보다 더 신비롭고 아름답고 기대 못한 일들로 가득 차 있더라.

지루한 인생만큼 재미없는 건 없잖아. 수많은 일들이 끊이지 않는 너라는 우주를 걷게 해줘서 고마워.


그럼 안녕.

다음 편지에 또 보자.


아직은 초침 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아침에

엄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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