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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내음 Mar 29. 2016

두 번째 편지

태명, 너와 세상의 첫 번째 인연

사랑하는 나의 딸, 도담이에게


첫 편지를 보내고 나서 엄마는 오랜만에 너의 태아 사진들을 꺼내어 보았단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점같이 보이던 네 모습이 출산일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하나의 생명체에 가까워진다는 게, 다시 봐도 '생명의 신비'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더라. 여러 초음파 사진 중에 그래도 역시 백미는 유일하게 흑백이 아닌 입체 초음파 사진. 이 사진 찍을 때 잠시 고민했던 게 생각나. 어른들만 좋다고 너를 너무 괴롭히는 건 아닌지, 안 그래도 우리나라는 산모들이 지나치게 초음파를 많이 찍는다는 데 굳이 이 사진까지 찍어야 하나 싶어서. 만약 초음파 사진을 너무 많이 찍어서 네가 엄마 뱃속에서 힘들었다면 많이 늦었지만 미안하다는 말 전할게. 우린 그때 너무 네가 보고 싶었나 봐. 


지난번에는 네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던 날 엄마의 호들갑에 대해서 얘기해줬지? 오늘은 그런 호들갑이 점점 사라진 뒤 본격적으로 너와의 소통을 위해 네 이름을 지었던 것에 대해서 말해줄게. 아마 지금쯤 너는 의아한 마음이 있을 거야. 내 이름은 서진인데 왜 자꾸 도담이라고 부르나. 도담. 그게 네 태명이야. 태아의 이름이라 풀어쓸 수 있겠다. 외국과 다르게 우리나라는 아이가 태어나면 1살이 되는 거잖아. 엄마 뱃속에 있었던 열 달동안도 사람으로서 동등하게 대우한다 생각하면 이름은 당연히 있어야 하겠지. 그래서 많은 부모들은 뱃속의 아기를 위해 열 달 간 부를 이름을 짓는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엄마가 참 좋아하는 시란다. 너도 아마 학교에 가게 되고 시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면 한 번은 꼭 만나게 될 시겠지. 이 시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우리 부부에게 너의 태명을 짓는다는 건 바로 이 시에서 강조하는 관계 맺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서야. 시에서도 말하잖아.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타인과 내가 어떠한 관계성을 맺는 것의 첫 단계, 인식하기의 가장 첫대목이라고. 


우리도 너라는 우주와 관계를 맺기 위해, 더 나아가 너라는 존재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태명을 지을 필요가 있었어. 사람들은 종종 태명에 관해 별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엄청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생각하게 되겠지. 


그러면 대체 어떤 이름이 좋을까. 우리 부부는 생각해봤지. 보통은 임신을 하게 된 날 특별한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을 따서 짓는 경우도 있더군. 이를테면 '와인 베이비' 이런 식으로 말이야. 이름 치고는 좀 진지하지 못한 면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특별한 이름일 확률이 높을 테니 그것도 좋은 방법 같아.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부부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 너도 이미 저번 편지에서 확인했을 거고. 그래서 우리는 부르기 좋고 의미가 좋은 이름을 찾아보기로 했어. 역시나 게으른 엄마는 아빠에게 태명 짓기 미션을 주었지. 심지어 순우리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조건까지 내달고 말이야.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바로 '도담', 세상에서 너를 처음 부른 그 이름이지.  


도담 : 야무지고 탐스럽다. 


아무 준비 없는 우리에게 어느 날 와준 네가 열 달 간 엄마 뱃속에서 야무지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뜻에서 고른 너의 첫 이름, 도담. 아무렇게나 지은 건 아니구나 생각하니 기분 좋지 않니? 


사실 아이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짓는 부모는 아마 없을 거야. 도담이에 이어 서진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는 아빠는 심지어 작명 책을 3권이나 사서 며칠을 끙끙거리며 지었단다. 다른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엄마도 엄마가 되어보고야 알았어. 


엄마는 어릴 때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너무 흔해서 매년 같은 학년에 한 둘 씩은 똑같은 이름이 있었거든. 그때는 어린 마음에 아주 특이한 이름을 가진 친구들을 몹시 부러워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원망했지. 왜 이렇게 내 이름을 흔하디 흔한 것으로 대충 지었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겠구나 하는 것을 참 뒤늦게도 알았다니, 역시 사람은 같은 자리에 놓여봐야 이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가 봐. 


태명을 짓고 나서 엄마와 아빠는 매일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단다. 

도담아, 뭐하니? 도담아, 오늘은 어떤 날이야 등등. 

특히 엄마는 아침에 샤워를 할 때마다 점점 볼록해지는 배를 만지면서 늘 너에게 수다를 떨었지. 그중에서 하나라도 기억나는 게 너는 물론 없겠지. 그런 걸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너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오늘도 엄마는 여러 번 너의 이름을 부를 거야. 

서진아, 제발 뛰지 마. 서진아, 밥 안 먹으면 요구르트 안 줄 거야. 서진아, 미끄럼틀 타러 갈까 등등.

도담이 시절보다 따뜻한 단어가 많이 줄은 것 같구나. 그래도 이 모든 말들이 엄마의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것 우리 딸이 기억해 줄 수 있겠지? 그럼 엄마는 이제 우리 딸 이름을 부르러 가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목련의 꽃봉오리가 하늘을 가리키는 날,

엄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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