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소년과 꽃 소녀

상실 속에서도 이어지는 관계를 담은 작은 이야기.

by dodamgaon

흙 속에는 늘 조용히 꿈꾸던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발자국이 그를 짓누를 때도,

비가 스며들어 몸이 무겁게 젖을 때도,

소년은 묵묵히 흙 속에 남아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가운 땅을 뚫고 작은 싹이 솟아났다.
햇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던 그 싹은, 이내 꽃 소녀의 모습으로 피어났다.

그녀는 바람에 꽃잎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안녕?"


소년은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알았다.

흙 속 어둠에만 익숙했던 자신의 세상에, 이렇게 밝고 가벼운 존재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부터, 흙 소년의 모든 시선은 꽃 소녀를 향했다.

누군가 주는 물과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도 꽃 소녀는 행복하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저 아이는 어떻게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소년은 문득 궁금해졌다. 촉촉하게 스며드는 물은 곧 흘러 사라지고, 다시 메마른 흙만이 남았다.

그는 더 깊이 궁금해졌다.


‘나도 그 물을 그냥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오래 머금고, 기억하고 싶다.’


밤이 깊어가자, 흙 소년은 여전히 꽃 소녀를 떠올리며 잠들지 못했다.


그때였다.

밤 사이, 누군가 소년의 소원을 듣고 다가왔다.

바람도 아닌, 빗물도 아닌, 낯선 발자국 소리가 흙 위에 내려앉았다.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뜬 소년은 햇살처럼 활짝 피어 있는 꽃을 보았다.

꽃 소녀가 눈을 뜨더니,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안녕?”


소년은 순간 당황해 입술만 달싹였다가, 겨우 목소리를 꺼냈다.


“아… 안녕?”


소년의 떨리는 목소리에, 소녀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나, 너하고 얘기하고 싶었어.”


소년은 가슴이 두근거려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늘 흙 속에서 세상의 무게만 견디던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게 될 줄은 몰랐다.


“나도…”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너랑 얘기하고 싶어.”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흙 소년이 세상에 처음 꺼낸 진짜 말이었다.

서로의 목소리를 주고받는 동안, 흙 소년과 꽃 소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물을 주던 누군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햇살만은 여전했으나, 땅은 서서히 메말라 갔다.

소년의 몸도, 꽃 소녀의 잎맥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눈앞에서 꽃잎 하나가 조용히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바람에 실려 흩날리듯, 소녀의 웃음도 함께 옅어졌다.

이어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꽃 소녀의 꽃잎은 하나씩 흩어져 갔다.


비극적 이게도, 꽃 소녀는 결국 힘을 다해 사라졌다.

둘에게 찾아오던 빛이, 어느 순간 사라졌고,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흙 속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소년은 그저 흙 속 깊이 몸을 웅크린 채, 떨어진 꽃잎을 가슴에 묻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흙 속에서 작은 씨앗 하나를 발견했다.

꽃 소녀가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이었다.


소년은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단순히 세상의 무게를 견디던 흙이 아니라,

소녀를 지켜 주던 소중한 터전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자, 씨앗은 다시 뿌리를 내렸다.

그 뿌리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흙 소년에게 닿았다.


소년은 느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꽃 소녀가, 여전히 자신의 품속에서 숨 쉬고 있음을.

그리고 소년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작가의 말

흙 소년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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