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만 24세 대표의 이야기 - 1부

안녕하세요 도다라는 초기 스타트업의 아빠 곽도영입니다. 오늘은 현재 기준 만 24살인 제가 왜 스타트업을 창업하게 되었는지, 왜 하필 심리테스트 빌더였는지, 왜 지금은 폼을 혁신하고 싶어하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던 학생  

중학교 때 댄스 동아리 친구들과 아이돌 스타분들을 보면서 연예인이라는 꿈을 꾸게 된 저는 안양예술고등학교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했어요. 배우를 꿈꿨지만 연기과가 아닌 영화과로 들어간 저는 처음에는 영화과 친구들 사이에서 꼴찌만 했어요. 영화는 즐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공부를 할 줄은 몰랐던 저는 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러다가 1학년 말에 교내 영화제에 낸 영화가 상을 받으면서 제가 영화에 재능이 있다고 철썩 같이 믿기 시작했어요. 여느 학생들처럼 인생을 승자와 패자가 있는 유한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던 저는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이 제 인생을 승자로 이끌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시그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스스로가 영화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저는 영화과의 커리큘럼에 따라 수많은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쓰고,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 감독을 꿈꾸게 되었어요. 칭찬을 또 받고 싶었고,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영화 감상문을 1편 쓸 때 저는 5편씩 작성하면서 전공에도 열심히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졸업할 때는 교과 성적과 전공실기 모두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고,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과에 진학했어요.   

2. 강제로 경제적 독립  

운명의 장난처럼 20살이 되던 해 1월에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버렸고, 저는 월세 20만원짜리 고시원에 들어가 혼자 살기 시작했어요. 학비부터 생활비, 식비까지 모든 것이 걱정되는 절망적인 시간이었고, 저는 닥치는 대로 알바와 인턴십에 지원했어요. 손이 부르트고 몸이 아프도록 알바를 하면서 돈을 모았어요. 장례식 운구 알바, 결혼식 하객알바, 편의점, 행사 진행요원 등 여러가지 알바를 해본 것 같아요.


학교에 입학해서도 고등학교 때처럼 학점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어요.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아야했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놀 수 있는 돈도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도서관에서 수업 공부와 책읽기만 반복했어요. 좋은 성적으로 학기를 마친 뒤 여름 방학에는 영상 일을 계속 할 지에 대해 확실하게 결정하자는 생각으로 상업 영화 연출부 막내로 들어갔어요. 하루에 26시간 정도를 일했고,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촬영이 끝난 뒤에 받은 돈은 이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너무 쉬울 정도로 정말 작았고요.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생각 한 뒤에 저는 바로 재수를 시작했어요. 


여름 방학과 영화 촬영이 끝난 뒤, 얼마 안 남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했고, 21살에 재수를 마친 저는 제가 영화를 공부할 때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봉준호 감독님을 따라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어요. 바라던 학교 바라던 과에 입학해서도 학식값 3000원이 없었고, 연세대학교 교목실의 지원을 받아 학식 값을 지원받았어요. 원래 학식용 키오스크에서는 하얀색 식권이 나오는데, 저는 연세대학교 교목실에서 지원받은 파란색 점심 식권을 아주머니께 따로 드리면서 밥을 먹었어요. 그 때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동기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어요. 그런 상황이었다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술자리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못 했어요.


공부한 추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다행히 올 A+을 받았고, SBS 서암윤세영 재단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학비 전액을 지원받게 되었어요. 학비에 대한 걱정은 덜었지만 여전히 생활비에 대한 걱정은 가득던 저는 지긋지긋한 돈에 대한 걱정에서 제발 좀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21살 여름방학에, 돈과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여러가지 책을 읽었지만 가장 제게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은 <부의 추월차선>이었어요.   


3. 장사를 시작하다.  

이 책에서 노동의 증식속도가 자산의 증식속도를 이기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학식 값도 없던 제가 자산을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너무 막막했어요. 자산에는 주식, 부동산, 코인 같은 것들이 있는데 학식 값도 없었던 터라 제게는 시드머니 자체가 없었어요. 시드 머니가 없는 상태에서 ‘자산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회사를 직접 창업해서 제로투원을 해내야한다는 선택지 하나 밖에 남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자산을 만들어내는 창업과 장사가 다르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미국의 어린아이들이 레모네이드를 팔듯이 ‘싸게 사서 비싸게 팔자’를 실천해보기로 했어요. 연고전과 UMF, DJ페스티벌 등 여러 행사에서 타투 스티커(판박이)와 눈 밑에 붙일 수 있는 큐빅들을 1000원에 팔기 시작했어요. 이 때 결제를 기다리던 고객분들이 그냥 떠나는 것을 보고 지금의 CTO인 일다님께 결제를 부탁했던 게 저희가  함께하게 된 계기였어요. 하루에 많게는 170만원, 적게는 50만원씩 벌었는데 지속가능하지 않은 한 철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해서는 자산을 만들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4. 캐릭터 라이선싱 스타트업을 시작하다.  

저는 개발을 할 줄 몰랐고, 개발자를 어떻게 구해야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개발이 필요한 아이템을 고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과 디자인 관련 아이템들을 생각해냈어요. 에어비앤비처럼 여행지의 영상작가, 사진작가를 매칭시켜서 인생 사진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주는 사업도 생각해봤지만 빠르게 해볼 수 있는 서비스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카카오프렌즈와 같은 IP 비즈니스를 해보기로 했어요. 좋은 스토리와 캐릭터로 잘 되고 있는 작은 스타트업들도 많았기 때문에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등학생들이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교의 캐릭터들의 굿즈를 살 수 있는 한국 대학교 버전 카카오프렌즈, 애니브프렌즈를 만들었어요. 스마트 스토어로 제품을 등록하면 될 일을, 당시에는 브랜드인데 제한적인 스마트 스토어의 커스터마이즈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일다님이 직접 쇼핑몰을 만들어주시면서 일다님이 개발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6개월 동안 쇼핑몰을 만들었고  , 일다님과 함께 굿즈를 디자인하고, 만들어진 제품들을 소분하고 포장하고, 배송하는 일까지 전부 둘이서 하면서 월 150만원 정도의 매출을 만들어냈어요. 전국의 유명한 편집샵들에 입점도 했는데, 생각보다 저희 인건비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낮에는 학원 강사를,  밤에는 애니브프렌즈를 위해 일을 했어요. 매일매일 성과가 안 나오는 것이 정말 답답했어요.  


5. 네이버 실검 1위 3번, 가능성을 보다.  

애니브프렌즈를 운영한지 1년이 되던 날, 만 22살의 어느 날, 저희는 수많은 재고 박스 사이에서 밥을 먹으며,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학생들의 성격과 맞는 학풍의 대학을 매칭시켜주는 콘텐츠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2일만에 만든 <나와 어울리는 대학교는?>라는 콘텐츠는 오르비와 수만휘와 같은 수험생들의 커뮤니티들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성과를 만들었어요. 창업을 하면서 처음 얻은 성과에 저희는 흥분했고, 운이 좋아서 잘 된 것인지 진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인지를 판별해보기 위해서 두 번째, 세 번째 콘텐츠를 만들어봤어요.


저희는 다음 콘텐츠로 <나와 어울리는 방탄소년단 멤버> 테스트를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BTS 멤버 제이홉님과 진님이 플레이해주시고 위버스라는 커뮤니티에 인증글을 올려주셨어요. 역시나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고, 전세계 트위터 트랜드 1위를 dodamind가 차지했어요. 5분당 동접 17만명이 몰리면서 서버가 11번이나 다운됐어요.

                    

  

6. 비개발자에게 일다님을 선물하고 싶다.  

그 때부터 대기업들의 러브콜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17개의 대기업 네이티브 콘텐츠 제작 계약을 수주했고 건당 1500만원에서~4000만원을 받았어요. 당시 저희 팀은 라운님과 제가 기획을, 제가 디자인을, 일다님이 개발을 하며 일당 백을 해야하는 3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팀이었는데 외주를 하면서 왜 대기업들이 우리를 찾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뷰를 했어요. 대부분의 기업들은 ‘저희가 정말 잘 만들어서’, ‘퀄리티 컨트롤이 잘 되어서’라고 말해주셨는데, 카카오는 ‘개발자분들이 코어 기능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서 공수를 받기 어려워서’라고 답변해주셨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개발자분들이 부족해서 저희를 찾았다는 생각에 조금 서운했지만 이내 여기에 열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당시 만 22살이었던 저는 이메일이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안 보고 있었는데, 한 달에 80건 가까운 협업요청이 쌓여있었어요. 그래서 그 분들과 이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보니 카카오와 동일한 문제인 ‘개발자 공수’라는 문제 때문에 저희를 찾아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분들 입장에서는 1000만원이라고 하는 저와 일다님의 인건비를 감당하실 수가 없었고, 계약으로 전환이 되지 못 했어요. 


이 때 저는 저와 일다님의 인건비가 들어가는 이상 절대 비용을 1000만원 이하로 내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와 같은 비개발자 분들께 저희 CTO님이신 일다님 같은 분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 SaaS는 고객사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채용하는 서비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봤죠. 이렇게 외주를 하는 에이전시가 정녕 내가 원하는 회사의 모습일까? 당시에는 커뮤니케이션이 너무 헤비한 것에 학을 뗀 상태였어요. 그래서 ‘내가 무엇을 싫어하지?’ 를 고민해봤어요.


‘헤비한 커뮤니케이션’, ‘직접 모든 것을 해주는 리소스’, ‘수주를 할 수록 인원이 비례해서 늘어나야하는 구조’가 제가 싫어하는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드래그 & 드랍으로 고객사가 직접 코딩이 필요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노코드 SaaS’ 서비스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2부 보러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서비스명을 바꾸다, 스모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