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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프 May 16. 2020

어느 작명가의 힙합 감성

라임의 힘

  나는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 이름을 좋아한다.

  이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정엄마는 작명소에서 우리 형제들의 이름을 지으셨다. 덕분에 우리들 모두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우리들의 이름은 연예인에게도 있고, 광고에도 있고, 드라마에도 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있다. 있어도 너무 있다.

 

  같은 이름이 많다는 것은 참 불편한 일이다.

  1. 나의 고유성을 흔든다.

학교 다닐 적에 많게는 한 반에 3명이나 똑같은 이름을 가진 가진 친구들이 있었다.

지영 a, 지영 b, 키 큰 지영, 키 작은 지영 등으로 불리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2. 남도 불편하게 한다.

  나에게 메일을 쓰려고 사내 전산망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면 15페이지가 넘게 나온단다. 같은 도에 살고,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메일 쓰는 시간보다 15페이지 안에서 나를 찾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3.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나의 지인들이 '나와 같은 이름 but 다른 사람'에게 톡이나 문자를 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리곤 나를 탓한다. 왜 연락을 씹냐며.. (나에게 죄가 있다면 작명소에서 지어준 이름을 가지고 사는 것뿐이고..)


  이런 이유로 나는 요즘에 핫하다는 이름 또는 작명소에서 지어주는 이름을 싫어한다.

흔해질게 불 보듯 뻔하니까.. 흔한 이름으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아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랑스러운 손자들이 태어나자 친정엄마는 용한 작명가가 지은 이름을 선물해주고 싶어 하셨다. 용하기가 말로는 못하단다. 아이의 운명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을 짓는다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며 채워주는 이름, 입신양명할 이름, 오래오래 잘 살 이름을 지어준단다.


  엄마 말로는 이분에게 이름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간청을 해도 안 지어 줄 때도 있다. 한순간 심기가 틀어지면 영영 이름을 안 지어 주기도 한단다. 나이가 많은 분들도 팔자를 바꿔보고자 이분한테 이름을 많이 지어 간다고...

  

  이 분은 이름을 지으실 때도 강단이 있다. 두세 개도 아니고 딱 한 개! 한글 이름만 가르쳐 준다. 한자도 주지 않고 뜻만 풀이해준다. 이름을 받을 때 '혹시 한자는 뭐예요?' '이 글자를 쓸까요? 저 글자를 쓸까요?' 하고 이분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을 했다간 큰일 난다. 심기가 한번 틀어지면 불같이 화를 내고 돌려보내는 사람도 많단다. (이 대목에서 이분이 한자를 잘 모르는 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런데 이 유명한 작명가는 사실 진짜 작명가는 아니다. 엄마가 유독 신뢰하시는 정신적 지주다. 엄마는 이분에게 인생의 모든 대소사를 물어보셨다. 땅을 팔 때도,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때도, 시집 장가를 보낼 때도 이분의 허락 멘트를 들어야 안심이 되시는 듯했다.


그 엄청난 분이..

그 용한 분이

우리 큰 딸의 이름을 지었다.


엄마는 나보고 복채를 50만 원이나 준비하라고 했다. 잘 나가는 작명소에서도 20만 원이면 충분한데...

50만 원이라니.. 너무 과하다.. 그래도 금덩이 같은 내 자식에게 좋은 이름을 선물한다 생각했다. 친정엄마도 서운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2009년생인 우리 딸에게 나온 이름이..

'김은실'이다.


산후조리를 하느라 침대에 누워있던 나를 스프링처럼 튀어올라 똑바로 앉게 했던 이름...

'김은실'

6년간 은실이로 살다 개명한 우리딸의 편지.. 지금은 시아버지 핸드폰에 내가 은실이로 저장되어있다

6년 후 나는 둘째 딸을 낳았다.

그 용한 작명가 분이 이번에 지은 이름은

'김명실'

원래는 '명순'이로 나왔는데 언니와 이름을 맞추려면 '명실'이도 괜찮다고 했다.

둘째는 2015년 생이다.


은실..

명실..

...

굳이 라임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데....

용한 작명가는 힙합 감성을 가지셨나 보다.  

그리고 작명소에서 짓는 이름은 흔하다는 내 선입견도 깨뜨려 주셨다.


16부작 가족 드라마 같은 에피소드 끝에..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리 딸들은 개명을 했다.

엄마에게 불효 같았지만 나도 어미다.

법원에 15,700원의 수수료를 내고 개명신청을 했다.

신청한 지 한 달 만에 개명이 되었다는 우편을 받았다.

허무했다.


엄마 용서해주세요. 석고대죄하는 마음입니다.
엄마 딴생각해서 죄송해요. 천국 가서 효도할게요.
저도 어미라서.. 지금은 우리 딸들 먼저 생각하네요.
사랑합니다.
-넷째 딸 드림-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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