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였다. 인도에서 차도로 미친 듯이 뛰어든 적이 있다. 하마터면 '초졸자'로 생을 마감할 뻔했던 그 미친 뜀박질은, 나름 새 빨개진 얼굴을 가리기 위한 위장술이었다. 100mm 앞에서 우주 최강 훈남이었던 선배가 내쪽으로 걸어왔는데(사실 내쪽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방향’이란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때마침.. (그지같이)5월이었고... 하필이면 길 양쪽에늘어진 벚꽃이 웨딩 피날레에 흩뿌려지는 꽃잎들처럼 마구잡이로 스스로를 내던졌다.난 순식간에 빨강얼굴앤이 됐다
출처: 빨강머리앤
벚꽃이 열일한 덕분에 로맨틱 킬링 포인트 장면을 연출했다. 내 귀에만 배경음악도 깔렸다.
출처: 빨강머리앤
그는, 그냥 길을 걸었을 뿐이고... 나는설렜다.
당황하면 사람의 지능이 파충류 수준까지 떨어진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때의 나는, 그냥 덜 떨어진 중학생이 아니라 종을 넘나드는 수준의 IQ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어깨 위로 자리 잡은 묵직한 것이 ‘나는 이제 사람이 아니므니이다~’를 외치고 있었던 거다. 그때나는 그냥..개구리, 이구아나, 카멜리온, 코브라, 살모사, 장지뱀이었단 말이다.
사람이 아니므니이다~ 출처: pinterest 편집사용
점차 물리적 거리를 좁혀오는 훈남 선배의 축지법은 도화지 위에 속절없이 똑.. 똑.. 또또독.. 떨어지는 수채화 물감처럼 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파충류 뇌를 총동원해 2초 만에해결책을 생각해냈다.오징어 마냥 몸을 배배 꼬다가(실제로 중딩 때 별명이 오징어였다) 차도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훈남 선배가 나를 보기는 봤는지... 아니면인도위에서꾸무적거리는‘교복 입은 비둘기’정도로 인식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설렜고. 빨개졌고.차도로 몸을 내던졌을뿐..
등굣길동반자 수연이가 내손을 낚아채지 않았더라면, 난 10대에 요단강을 건넜을 거다. 지금쯤 저 세상에서 ‘짧고 굵게 살았다’며모세앞에서간증을하고 있겠지.
아무튼, 훈남 선배를 시작으로.. 이밑도 끝도 없는설렘은나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생겨나 갑자기온몸으로 퍼져버리는두드러기같이 인생 전반에 걸쳐 갑자기 툭 튀어나와 온 마음을 간지럽혔다.
고등학교 때는 오락실 DDR에서 바보 멍충이처럼 춤추는 덜떨어진 놈(아마지금쯤 두 아이의 아빠가 됐을그대에게... 쏘리...)에게서 광채를 보았고, 대학 2학년쯤엔 지역방송의 아나운서를 닮은버스 맨에게서간질간질함을 느꼈다.
그렇다. 이제껏 남자였다.정류장에서 뛰어내려뒤를 졸졸 따라가고 싶게만드는 그 '설렘'의 주체들은 주로 나와 성이 다른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고착화된설렘이...
난데없이...어느 날...
그냥... 그렇게... 튀어나왔다
빵을 한입 베어 물었을 뿐인데..
순삭. 3조각이나 먹었다.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서 있는 에펠탑을..
그 아찔함을... 느꼈다. 정말로 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팥빵...
뭐 이런 팥빵이 다있어!!??
‘여기 사장님은 파리유학생이었을 거야.어느 날아침 일찍 집을 나선 거지. 시험기간이었거든. 도서관에 일찍 가려고 페달을 힘껏 굴리며 자전거에 몸을 실었지. 새벽 공기가 뺨에 닿는 시원함이 좋아 한참을 달리는데. 풀려버린 실타래의 끝자락처럼옅은 빵 냄새가 나는 거야.
'음~ 어디서 나는 냄새지?'
코를 간지럽히던빵 냄새를맡고 다짜고짜 외딴 길로 걸어가게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뭣이 중한디. 그래서도서관은 제끼고 빵집을찾아 헤매게 된 거야.홀린 듯 말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들린투박한 종이 포장지가 보였어. 사악하리만큼 바삭한바케뜨. 겹겹이 이국적인 자태를 드러낸 크로와상..집 나간며느리도 잡아다 앉힐 프랑스 팥빵이거기 똭~있었던거지.... 그래.. 마리 앙뜨와네뜨가 헛소리를 한 이유가 있었다니까.. 고기가 없으면 빵을 주라고.프랑스빵이 맛있다는 뜻이겠지.아니 빵이 없으면 고기를 주라 했던가... 에라잇 알게뭐야. 걍 빵이 맛있단 말이잖아. 빠바가 괜히 나왔겠냐?.. 안돼겠다 사장님한테 물어봐야지..
사장님 이 팥빵이거 뭐예요!!
프랑스 팥빵이죠? 이거 뭔데 맛이 이래요!!
너무 맛있잖아요..
3조각이나먹었다고요.... 벌써..
이건 유혹이지. 암 그렇고 말고.
나는 또다시 빨강얼굴앤이 됐고찰나의 설렘을 느꼈다.팥빵에게 말이다.
아~ 앙버터 말씀이세요?^^
팥빵이 맞긴 하는데 애 이름은 앙버터예요~
내맘대로 프랑스 팥빵^^
남편이 남자 친구였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수를 느끼고야 말았다.
이제 막 개업한 로다**의 빵들은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다. 케이크류 5~6개, 크로와상, 팔미에, 앙버터, 에그타르트, 마늘바게트, 사과파이, 코코넛 만쥬, 쇼콜라.. 이게 거의 다였다. 심지어 내가 처음 방문한 그날엔 개업한 지 얼마 안돼 가짓수가 더 적었다.
오픈 발에 속는 셈 치고 앙버터와크로와상, 조각 케이크 한 개, 마늘바게트를 샀다. 하지만앙버터를 한 입 베어 물고 알게 됐다.
이건 운명이야. 이집빵을 사랑하게 될 거야.
'교복 입은 비둘기'가'빵집비둘기'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고요한 그곳에서 앙버터를흔적도 없이 해치우고.. 남은 부스러기기 잔해들을 하릴없이 쪼아대며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나.
오늘부터... 이 집 빵을 사랑할 거야...
나.. 이거... 만들 거야..
내 손으로 만들고 싶어... 꼭 배우고야 만다. 빵..
바로 여기서!!! 파리 사장님한테!!
파충류의 머리로, 또 도로에 발을 내디뎠다. 미친 뜀박질을 하고야 만 것이다. 빵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