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세상으로 복귀를 시작하다.
하루씩 시차를 두고 세 명 모두 설사로 고생하였습니다. 고산병 증상입니다. 고산병은 해발 2000~3000m 이상의 고지대로 이동했을 때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나타나는 신체의 급성반응입니다. 생각지 않은 하루의 휴식은 지친 몸과 마음에 단비가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하루의 휴식
통유리로 멋을 낸 롯지 식당에서 설산과 호수를 바라보며 나른한 오후를 보냈습니다. 트레커들은 난롯가에 모여 앉아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합니다. 피크 등반의 경험담부터 가이드와 포터를 고용하지 않는 ‘나 홀로 트레킹’까지 고생을 많이 할수록 이야기 소재는 풍부해집니다.
식당 구석에는 가이드와 포터가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현금이 오고가는 게임이기에 표정이 진지합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우리 팀의 포터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몸집이 왜소하고 신발이 낡아 트레킹 첫날부터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는데. 오락이 도박으로 변질된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저와 눈길이 마주치자 “No Problem”이라며 미소를 띠지만 그 모습이 더 안쓰러워 보입니다.
고쿄(4750m)에서 렌조라(5417m)를 넘어 남체(3440m)에 갈 수 있습니다. 계획했던 쿰부 3패스 중 꽁마라(5535m)와 촐라(5420m)를 넘지 못했기에 마지막 남은 렌조라는 넘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 팀의 바람입니다.
가이드와 롯지 샤우지가 한참을 의논한 후 폭설로 ‘불가능’하지만, 500$을 지불하면 자신들이 러셀(등산할 때 선두에 서서 눈길을 만들면서 전진하는 것)하여 길을 만들겠다고 제의를 합니다. 돈의 액수도 무리지만 목숨을 걸고 산을 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에 포기하였습니다.
해발 5천 미터는 산소의 양이 해수면의 50% 정도입니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 어느 순간 호흡이 가빠지며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느낌입니다. 들숨과 날숨이 엉켜버리면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순간 공포감이 들며 ‘죽을 수도 있구나’하는 두려움이 느껴졌습니다. 한 참을 거친 숨을 내뱉은 후에야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상으로의 복귀
세상으로 복귀합니다. 무려 해발 1000미터를 내려 포르체탱가(3680m)까지 갈 계획입니다. 발 빠른 트레커는 남체까지도 가능합니다. 히말라야는 비교하는 곳이 아니기에 ‘빠르다’, ‘늦다’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판단과 책임은 본인이 져야합니다.
내려오면서 자꾸 되돌아보았습니다. 고쿄에 무엇인가 빠트리고 가는 것 같습니다. 눈 쌓인 호수와 설산과 시리도록 푸른 하늘의 강열한 대비는 원색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호수를 품은 마을 뒤편에는 세계 여섯 번째 높이를 자랑하는 초오유(8201m)가 작별을 고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새털구름이 푸른 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내려가는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머리는 천천히 걸을 것을 주문하지만 걸음은 빨라집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산을 오를 때에는 마음은 풍요로워졌지만 몸은 고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지금은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천천히, 천천히”를 주문하는 마음의 요구를 몸은 무시합니다. 단거리 선수처럼 빛의 속도로 세상으로 복귀하고 있습니다.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얼어붙은 호수를 타고 내려온 작은 물방울이 폭포가 되어 흐릅니다. 수억 년을 빙하에 갇혀 살다가 고쿄 호수를 거쳐 새로운 세상을 찾아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을 떠나 이곳에 온 저와 달리 물방울들은 히말라야를 떠나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납니다.
좁고 가파른 너덜길이 계속되었습니다. 좌측에는 촐라체(6440m)와 타보체(6495m)가 계곡을 따라 보이는 정면에는 탐세르쿠(6608m)와 캉테가(6685m)가 인사를 나눕니다. 이틀 전까지 함께했던 봉우리인데 새롭게 느껴집니다. 길은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됩니다. 올라올 때에는 거북이었지만 내려갈 때는 토끼 걸음으로 지나칩니다.
운치 있는 마체르모(4410m)와 루자(4360m)를 지났습니다. 계속되는 눈길 때문에 눈이 피로합니다. 자외선 강한 햇살이 눈에 반사하여 강하게 눈을 자극합니다. 선글라스가 없으면 설맹에 걸릴 수 있습니다. 포터와 가이드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걷습니다.
돌레(4040m)에 도착하였습니다. 올라갈 대 묶었던 롯지의 두 젊은 총각이 웃으며 인사를 건넵니다. 고쿄로 향할 때에는 힘든 하루 코스였는데 한나절에 도착하였습니다. 롯지는 여전히 텅 비어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레와 포르체탱가 사이에 있는 빙벽에는 네팔 젊은이들이 빙벽을 즐기고 있습니다. 나흘 전에도 만났는데. 포르체 마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동계 훈련 중이라고 합니다. 그 젊은이들은 네팔에서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걷는 포터와는 다른 세상 사람같습니다. ‘금수저와 흙수저’는 우리나라와 네팔이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해가 어슴푸레 질 시간에 목적지 포르체탱가(3680m)에 도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