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소와 진눈개비를 뚫고 도착한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ABC)
어젯밤 ‘히말라야 호텔’은 무척 혼잡스러웠습니다. 숙소 중 유일하게 난방이 되는 롯지 식당은 트레커와 포터들로 북적거려 자리 잡기가 어렵습니다. 트레커들은 추운 방 보다 식당에서 대화를 하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스마트 시대 히말라야
시바스(스페셜 포터)가 “내일 ABC(안나푸르나베이스 캠프, 4,130m)에 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면서 전화로 숙소 예약을 하겠다고 합니다. 오늘밤 히말라야 호텔(2,840m)과 데우랄리(3,230m)에서 숙박하는 대부분 트레커들이 내일은 ABC를 목적지로 할 것이기에 시바스의 말에 신뢰가 갑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포터 중 똘똘한(?) 친구를 선발하여 먼저 출발시켜 방을 확보하였는데 스마트 시대에는 휴대폰으로 해결되나 봅니다. 스페셜 포터로서 뭔가 한방을 터트리려는 시바스의 노력에 감탄하며 예약을 부탁합니다.
어젯밤은 음주를 하지 않았습니다. 해발 3,000m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고소 예방의 가장 좋은 방법은 비아그라나 다이아막스 같은 약이 아닙니다. 교만하지 않고 순리대로 걷는 것이 가장 좋은 처방입니다. 힘들면 쉬고, 물을 많이 마시며,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고 천천히 걷는 것이 히말라야 트레킹의 순리겠지요.
불면의 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숙면을 취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어젯밤은 계곡의 물소리가 저를 잠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낮에는 잠들고 있던 계곡의 강물이 밤이 되자 깨어 저에게 무엇인가 말을 걸어옵니다. 강물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는 저는 심란하기만 합니다. 빙하에서 흘러내린 강물은 수억 년의 사연을 담아 모디콜라(강)를 따라 우리가 처음 트레킹을 시작한 비렌탄티를 거쳐 갠지스 강으로 퍼져 나가겠지요.
이제 트레킹을 시작한지 6일이 지났습니다. 지나 온 여정을 생각하면 가슴 설레지만 남은 일정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지나온 힘든 여정은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가야할 곳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눈을 감으면 지나온 곳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은 ABC(4,130m)까지 갈 생각입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에 출발합니다. 여전히 랄리구라스 우거진 밀림지대가 계속됩니다. 계곡 건너편에는 숱한 폭포가 우리를 환영하고 있으며 날씨 또한 쾌청하여 걷기에 좋은 날씨입니다.
한 시간쯤 걷자 힌쿠 동굴이 보입니다. 힌쿠 동굴에서는 우리가 걸어 온 히말라야 호텔과 다음 롯지가 있는 데우랄리(3,215m)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우린 점점 계곡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계곡이 깊을수록 설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산이나 사람이나 적당한 거리에서 마주할 때 더욱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데우랄리 위 롯지를 지나자 광활한 개활지가 나옵니다. 수목 한계선을 지났기에 이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평원이 펼쳐집니다. 지금은 겨울철인지라 꽃의 잔치를 볼 수 없지만 좋은 계절에 트레킹을 하신 분들은 천상의 화원을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개활지가 끝날 무렵 빙하의 잔해가 보입니다. 눈사태로 인해 그레이샤돔(7,193m)에서 흘러내린 빙하가 녹지 않고 트레커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터와의 갈등
점심 무렵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 3,800m)에 도착합니다. 우린 롯지에 점심을 주문하고 휴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후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30여분이 지나자 지친 표정의 후배가 롯지에 들어옵니다. 고소가 온 것 같습니다. 점심을 주문하고 휴식을 취해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습니다.
후배의 몸 상태를 고려해 시바스에게 오늘 숙소를 ABC에서 MBC로 바꾸자고 하니 그 친구의 인상이 갑자기 변합니다. 시바스는 계속해서 ABC에 가야한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물론 사전 예약을 하였지만 트레커의 안전이 더 중요한 것인데 이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무척 당황됩니다.
시바스를 설득하여 숙소를 MBC로 결정합니다. 다른 포터들에게는 휴식을 주고 두 명만 데리고 ABC로 향합니다. 출발한지 10분 쯤 지났는데 갑자기 날씨가 급변하며 눈발이 휘날립니다. MBC에서 ABC까지는 안나푸르나Ⅰ과Ⅲ, 강가푸르나, 마차푸차레 등 히말라야 12개 봉우리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짙은 안개와 눈발로 인해 한치 앞도 보기 어렵습니다.
아! 박영석
MBC에서 출발 한 후 1시간 30분 쯤 지나자 ABC 입간판이 멀리서 보입니다. 이제 해발 4,130m ABC(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입니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2011년 안나푸르나에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의 추모비입니다. 산을 오르기만 하면 된다는 등정주의 보다는 산을 오르는 방법을 중시하는 등로주의 등반에 관심을 갖고 ‘코리아 루터’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다 끝내 히말라야에 묻힌 3분의 추모비에 고개 숙여 묵념을 합니다.
짙은 안개와 진눈개비로 인해 내려가는 일도 올라가는 일 만큼 어렵고 힘이 듭니다. 더구나 어둑발이 깔려와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 걱정이 앞섭니다. 그때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우리를 앞서 내려가고 있습니다. 개 덕분에 쉽게 MBC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고소는 소리없이
저녁을 끝내자 모두 방으로 들어갑니다. 식욕부진, 의욕상실, 구토 등 고소의 초기 증세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저도 침상에 누워 보지만 잠을 자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침낭 속에서 몸만 뒤척입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밖에 나와 보니 아직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내일 내려갈 일이 걱정됩니다.
스마트 폰으로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들어도 밤은 좀처럼 지나가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자칫 호흡의 리듬이 깨지면 한 동안 숨이 헐떡거려 정상적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다시 시집을 꺼냅니다. 벌써 몇 번 째 읽고 있는 시집인데도 읽을 때 마다 다른 모습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한 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