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고릴라, 그리고 어린이날

나, 고릴라 그리고 원숭이 별 / 프리다 닐손 글 / 시공주니어

by 느닷

숫자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설날, 어린이날, 내 생일, 크리스마스는 용케 까먹지 않고 손꼽아 기다렸었다. 당당하게 용돈과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날이니까. 어제는 '어린이날'이었다. 3~40년 전 나의 어린이날과 지금의 어린이날은 그 이름이 주는 특별함도, 스케일도 참 많이 바뀐 것 같다. 웬만한 용돈이나 특별한 장난감으로는 이 날의 의미에 걸맞는 감동을 표현하기 힘들 만큼 풍족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주변을 조금만 벗어나 시야를 넓혀보면 아직도 존중이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충만한 사랑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어린이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그런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소식을 접하거나 실제로 가끔 눈에 띄기도 한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지만 섣불리 개입할 수도 없는 이 아이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볼 때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이 행복한 성인으로 자라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특별한 날을 이유로 건네는 선물? 축하의 말? 관심? 요란하고 큰 행사? 얼마 전에 프리다 닐손의 '나, 고릴라 그리고 원숭이 별'이라는 아동소설을 읽으면서 세상이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과, 아이들이 세상에 바라는 것의 괴리를 잠시 엿보았다.






나, 고릴라 그리고 원숭이 별 / 프리다 닐손 글 / 시공주니어



쑥국화 고아원의 그레드 원장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보호자이다. 아이들에게 과중한 일을 시키고, 비난을 일삼으며 부당한 대우를 하는 어른이다. 고아원 51명 원생들의 유일한 희망은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되는 것. 주인공 욘나 역시 입양되기만을 기다리는 9살 여자아이다. 손 씻는 것을 자주 깜빡하고, 늘 손톱 밑에 때가 끼여있는 욘나는 그레드 원장의 골칫거리다. 어느 날 고아원을 찾아온 남루한 행색의 거대한 고릴라 아줌마에게 욘나가 입양이 되어버리면서 둘의 유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릴라는 왜 하필 이 고아원으로 입양을 하러 왔을까? 왜 하필 욘나를 입양했을까? 고릴라는 왜 다른 어른들과 같은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뒤늦게 밝혀지는 고릴라의 비밀과 반전이 흥미진진하다.


어떻게 고릴라가 운전을 하고, 입양을 하고, 가족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어쩌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고릴라와 욘나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수많은 편견과 엉터리 잣대를 보며 어른으로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꼬집어 내는 장면이 많다. 그레드 원장과 시장은 고집스럽게 자격과 조건, 절차와 규율을 들이댄다. 응당 그러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법칙 안에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배려나 고민은 없다. 게다가 위선과 거짓으로 몹쓸 짓을 거리낌 없이 일삼는 이야기가 현실과 참 많이 닮아있다.


세상은 욘나에게 청결하고 깔끔하고 예의 바르고 똑똑하고 쓸모 있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지만 어린 욘나에게 필요한 것은 인정과 사랑의 온기였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사랑받고 있다. 너는 안전하다. 그래. 이게 먼저다. 고릴라 아줌마는 정리도 청소도 패션도 엉망인 데다, 가진 것도 많지 않지만 어른으로서 지금 어린 욘나에게 필요한 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가족이란 건 무엇인지, 함께 살면서 나눠야 할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아이들은 어쩌면 이 책을 읽으며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주는 듯한 욘나와 고릴라의 모험이야기에 통쾌함을 맛볼지도 모르겠다. 곳곳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펼쳐지고, 어린이날 선물용 장난감이 불티나게 팔리고, 치킨집에 대기번호가 긴 어린이날. 이 모든 것들이 휴일 하루의 잔치가 아니라 '어린이날'이 주는 의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중물 같은 날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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