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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관련 그림책이요~"

by 느닷

여름의 신호탄은 매미가 연주하는 서곡으로 시작된다. 수컷 참매미들의 세레나데가 북향으로 길게 늘어선 도서관 창문을 넘어 눅진한 바람과 함께 훅 들이치면 아이들의 옷이 짧아진다. 죄송하지만.... 도서관의 성능 좋은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구경하는 한낮의 여름 햇살은 까슬까슬하니 만만하다. 대신 초등학교 도서관 사서에게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은 뜨거운 햇살보다 만만찮은 시련이 찾아오고 있다는 뜻이다.


"사서 선생님~ 1학년 '여름' 수업에 쓰려고 합니다... 여름 관련 그림책 25권 정도 부탁드려요~"

'여름'으로 검색하면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책이 제법 많이 검색된다. 10분 만에 미션완료. 그런데 다음날 1학년의 다른 반에서 '여름' 책 요청이 또 들어왔다. 옆 반과 좀 같이 쓰면 어떨까 싶지만... 전지적 사서시점이라 고이 접어 패스.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시 검색어로 '여름'을 입력한 결과를 박박 긁어서 전달을 완료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2학년 아이들이 숙제라며 '여름'책을 빌리러 우르르 도서관을 방문했다. 이렇게 학년이 겹치기 시작하면 이제부터는 전쟁 시작이다.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책은 두꺼운 책 말고는 씨가 말랐는데 학생들은 숙제라며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 이제는 업무영역이 창의력의 범주로 넘어간다. 아이들과 '여름'하면 떠오르는 것들로 마인드맵을 펼쳐본다. 수박, 참외, 산딸기, 우산, 장화, 무더위, 밀짚모자, 얼음, 수영장, 여름휴가, 캠핑, 매미... 이런 검색어로 '여름'을 주제로 한 의외의 그림책들을 발견해 낸다. 휴... 아이들 손에 '여름' 그림책을 한 권씩 들려 보내고 한시름 놓았다.


다음날 아침. 숙제를 끝낸 학생들이 삼삼오오 까불거리며 그림책을 반납하러 왔다. 기나긴 줄이 채 줄어들기도 전에 2학년 부장님의 전화가 왔다.

"사서 선생님~ 내일까지 '여름' 주제의 그림책 30권 준비될까요~"

아이코... 흐릿한 어제의 기억을 소환하며 '여름 마인드맵'을 다시 뒤적인다. 아무래도 이미 대출된 '여름' 그림책들이 빨리 돌아오는 방법 말고는 30권을 도저히 다 마련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으니 영혼까지 그러모아 상상력을 탈탈 털어 서가를 훑는다. 이제 슬슬 자신이 없어진다. 안된다고 답하면 될 것을... 그 간단한 해법이 나는 싫다. 오기부리는 것이라고 고개 흔드신다면 겸허히... 인정. 굳이 승부욕을 불태울 필요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보람값'이라 답하고 싶다. 학교도서관이 교사와 학생들에게 유용할 수 있는 기회를 붙들어 낸 보람 말이다.


시간은 기약 없이 흘러간다. 오늘도 칼퇴는 실패다. 이쯤 되면 숨어있는 '여름' 그림책을 드문드문 발견할 때마다 묘한 짜릿함이 나를 위로한다. '모기와 춤을', '바다에 간 코르크', '더우면 벗으면 되지', '빗방울이 후두둑', '물싸움', '7년 동안의 잠', '온다', '아이스크림은 어디서 왔을까'... 있네! 또 있어! 이 소중한 정보들을 빠짐없이 *DLS의 도서 상세정보 '검색키워드'에 저장해 둔다. 내년 여름에 '여름' 책을 검색할 나를 위해서. 결국 '여름' 그림책 30권을 줄세우는데 성공했다. 오늘은 운 좋게 오기가 이겼다. 내일 2학년 1반 학생들은 '여름'주제의 수업을 재미있는 그림책과 함께 하게 될 터이다. 마음 주머니에 보람값을 두둑이 채우고 퇴근하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다. (*Digital Library System - 독서교육종합지원시스템의 약자로 도서를 등록하고 대출반납을 처리하는 교육청의 온라인 시스템이다. )


매주 화요일 2교시는 3학년 2반의 학급방문 시간이라 담임선생님과 학생들이 좁은 도서관을 가득 메웠다.

"여러분~ 오늘은 사회교과 3단원에 있는 '옛날 교통수단'에 대한 책을 찾아볼게요~"

아뿔싸. 작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주제이다. 미리 의논도 없었다. 하여튼 수업은 다짜고짜 시작돼 버렸다.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은 새로운 주제학습은 평소에 인기 없던 책들도 오랜만에 먼지를 털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는 점이다. 재미가 좀 없어도 주제에 맞는 책이라면 아이들은 책 속의 정보를 훑으며 보물이라도 찾은듯 서로 읽겠다며 야단이다.


도서관 좀 안다 하는 학생들은 목에 힘을 주고 먼저 책을 찾아내겠다고 눈을 반짝였다. 반면에 책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은 세상 난감한 얼굴로 서가 사이를 서성인다. 담임 선생님 한번 쳐다보고, 사서선생님 한번 쳐다보며 눈치만 본다. 그러니 나는 서둘러 검색을 시작할 밖에. '교통수단', '이동수단'으로 검색하니 3권밖에 없다. 혹시 '마차'는? 없다. '수레'는? 역시 한 권도 없다. 수레 대신 내 머리가 굴러간다. 굴리고 굴리고... 아 바퀴! '바퀴'로 검색하니 제법 검색이 되었다. 방향 없이 휘적이는 학생들의 발걸음을 보물 앞으로 조용히 옮겨 주었다.

"응? 너도 도와달라구?"

다음학기 도서구입 목록에 교통수단 책을 많이 추가해야겠다!


사서는 의외로 유연한 사고가 필수인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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