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면지를 도배하고 있는 파란색 모래시계와 빨간 달팽이. 면지 하나만으로 벌써 무척 인상적인 그림책을 발견했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이 흐른다고, 지나가고 있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시간은 무형의 것이다. 그림책에서 파란색은 주로 무의식과 꿈을 대변하는 색상이다. 인간의 무의식에서 끝없이 카운트되고 있는 시간을 줄지어 선 모래시계로 표현함과 동시에 실제로는 존재할 리 없는 빨간색 달팽이 그림을 왼쪽에 슬쩍 그려두었다. 빨간색은 생과 사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색상이다. 포르투갈 그림 작가인 마달레나 마또주 (Madalena Matoso)는 면지에서 벌써 이 그림책의 주제를 명료하게 다 말해주고 있다.
그림책은 좌/우 페이지로 구성된 매체이다. 보통 왼쪽을 '무의식', 오른쪽을 '의식'의 영역으로 해석한다. 그림작가는 마지막 면지에서 왼쪽 끝에 있던 달팽이를 오른쪽 끝으로 옮겨 놓으며 내면의 욕구를 밖으로 끌어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두고, 모든 것이 점점 사라지고 변하는 것을 통해 시간을 볼 수 있다고 설득한다. 특히 시간이 흘러도 항상 곁에 있는 것은 친구들이라는 이야기로 끝나는 글이 끝내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그림책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농익어 좋은 것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이 퇴색하는 것들이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필은 짧아지고, 식물은 물이 없으면 시들고, 과일은 먹지 않으면 상하고, 멋있던 것이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하고, 손등은 쭈글쭈글 거칠어지기도 한다. 반면에 냄비 속 양파는 부드러워지고, 촌스럽던 것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치즈는 맛이 좋아지고, 줄을 서면 내 차례가 오고, 어려웠던 일이 쉬워지기도 한다.
어릴 때는 시간이 흐르면서 얻을 수 있는 것에 집착하다가, 노화를 느끼면서부터는 나도 모르게 시간이 흐르면서 잃어버리는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언제고 시간이 흐르면서 잃는 것과 얻는 것들이 공존하는데 말이다! 돌이켜 보면 10대 때의 나는 정말 소심했다. 20대의 나는 고집스러웠고, 30대의 나는 어리석었다. 40대의 나는 소심하고 고집스럽고 어리석었던 내가 빛바래고 섞이고 익어지는 시간을 지나 양파처럼 부드러워지고, 치즈처럼 숙성되고, 어려운 일 앞에서 용감한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면 소심한 나는 아직 거기 어리석은 채로 멈춰 서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의 의지를 담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느리지만 조금씩 달팽이처럼 기어 나왔기에 나의 모래시계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으리라. 때로는 너무 고통스러워 삶을 멈춰 세우고 싶을 때도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기어가야 하는가 의문투성이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시구처럼 멈추지 않는 소나기는 없었고, 오지 않는 계절은 없었다. 내 소망이 어떠한가와 상관없이 시간이 무심히 흘러준 덕분에 실수도, 실패도, 쪽팔림도, 부끄럼움도, 그 모든 좌절과 절망도 시나브로 지나갔다. 물론 영원히 피어있는 꽃도 없기에 잠깐의 행복과, 기쁨, 작은 성취와 보람들 역시 찰나의 기억을 남기고 바삐 스쳐 지나간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시간이 흘러도 항상 곁에 있는 것은 친구라고 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무시로 다가왔던 소나기를 곱씹고 탓하며 살 것인지, 생에 피고 지는 꽃들을 기억하며 회상할 것인지. 그 선택에 따라 오랜 시간 내 곁에 머무를 친구들의 결도 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