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사서의 꿈

ㅣ 대출반납은 기계로도 가능합니다.

by 느닷

“좋은책도 이렇게 많고 조용하니 사서샘은 참 좋겠어요~ 나도 사서가 꿈이었는데….”

넓은 독채를 누리며 독서하는 고상한 사서를 꿈꾸는 분을 매년 한 명씩은 만난다. 다른 도서관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초등학교 사서는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프로산만러다. 쉬는 시간엔 쉬는 시간이라고, 수업 시간엔 수업 시간이라고, 점심시간엔 점심시간이라고 오는 아이들로 도서관은 늘 붐빈다. 방과후엔 나와 함께 퇴근시간까지 도서관을 이용하는 우수 이용자들까지. 도서관에서 조용히 독서를 즐기는 낭만은 진짜 꿈에서나 꿈 꿀 일이다.


도서관에 들어오는 아이, 나가는 아이 인사를 하다가, 대출/반납 바코드를 찍다가, 내부 메신저로 날아오는 담임선생님들의 문의에 답을 하다가, 급한 상호대차 도서를 신청하다가, 학부모 도서 도우미의 질문에 대답하며 눈치껏 담소를 나누다가, 엉망이 된 서가를 매만지다가, 쌓인 먼지에 놀라 청소를 하다가, 깜빡했던 내일 ‘학부모 책읽어주는 봉사’ 안내 문자를 발송하다가 퇴근시간을 알리는 알람에 정신을 차려 보면 마무리 안된 일들이 널브러져서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날이 수두룩하다. 멀티플레이가 안 되는 나는 업무 스위치를 껐다, 켰다, 이거 했다, 저거 했다, 그러다 깜빡깜빡, 휴대폰을 자꾸 화장실에 두고오는 프로 산만러가 되었다.


어수선한 학기 초에는 학생들의 도서관 방문이 어렵기 때문에 희망하는 학급에 한해 학급문고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학생 수만큼 각 교실에 책을 배달 해 준다. 보통 13~14반 정도 신청이 들어온다. 25권씩 14세트, 총 350권의 책을 골고루 골라 대출 바코드를 찍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진다. 본격적으로 수업이 진행되면 프로젝트 주제 관련 도서를 추려 각 교실에 넣어주느라 손이 바빠진다. 가끔은 수업 방식에 따라 똑같은 책이 여러권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 이럴땐 ‘상호대차’ 서비스를 신청해서 인근 공공도서관의 책을 택배로 신청하고 택배로 돌려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학년에 따라서는 온책 연계활동으로 아동극을 소개 해 달라거나,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면 예산을 품의하고, 작가를 섭외하는 등 더욱 분주해진다.


이렇게 짬 없는 사서에게 교내 메신저는 정말 유용한 수단이다. 새 책이 들어오면 신간 소식을 알리며 새책 냄새 맡으러 오시라고, 계절 바뀔 때마다 새 시집이나 잡지가 들어오면 수업에 활용하시라고 한번씩 홍보용 메신저를 날린다. 새 학기에는 올해의 신간추천도서 목록을 뿌리고, 방학을 앞두고는 한학기 동안 아이들이 대출한 책의 목록파일과 연체자 목록을 전달하며 교실에서의 독서지도를 독려하기도 한다. 모든 업무들은 한번에 한가지씩 진행되지 않고 늘 동시다발적으로 치고 빠지며 내 정신도 쏙 빼내간다.


2학기가 마무리되고 있다. 1학년 2반에 나이 지긋한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2학기 마지막 도서관 방문을 오셨다. 아이들은 익숙하게 지난주 빌려간 책을 반납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골라 편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삼삼오오 모여 서로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각자 발견한 신간을 자랑하거나 지난번에 읽은 책을 친구에게 소개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도서관을 채웠다. 지난 봄에 "이 책 집에 가져가도 되요?"라며 뚱한 얼굴로 질문하던 녀석들이 어느새 도서관을 의젓하게 즐기는 모습이 기특했다. 일년동안 아이들과 도서관을 꾸준히 방문해 주신 담임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해요. 사서가 관리하는 도서관은 여기서 처음 이용해 봤는데 사서선생님 덕분에 아이들 독서교육이 정말 수월했어요.”

지난 학교에서는 도서관이 아예 닫혀 있었고, 그래서 본인이 도서관을 담임업무와 겸해서 관리 했었지만 과중한 업무에 밀려 대출반납조차 쉽지 않았다고 고백하셨다. 반면에 이곳에서는 늘 도서관에 오라고 꼬드기는 사서선생님과 잘 정돈된 서가 덕분에 도서관을 편히 드나들 수 있었다며 아이들에게 단체로 감사의 인사를 시키고 가셨다. 나는 상이라도 받은것 처럼 주책없이 활짝 웃었다. 상으로 치면 아마 단체상 쯤 되겠다 상상하며. 도서부와 학부모 봉사자, 교무행정원, 담임선생님 등 학교 공동체 모두가 십시일반 품을 보태어 함께 일궈온 도서관이니 말이다.


1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은 내년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신다. 그곳 역시 사서가 없는 학교라며 아쉬워 하셨다. 사서가 없는 학교는 보통 국어교사나 교무행정원 등에게 도서관 관리업무를 겸해서 맡기고 학부모님들의 대출반납 봉사로 운영되기 일쑤이다. 과중한 업무를 떠안는 담당자도, 전문가의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도 모두 안타깝다. 모든 학교도서관에 사서가 존재하기를 꿈꾸는 것도 터무니 없는 낭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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