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느슨하게 쉬어보자.
학교 선생님이 지칠때쯤 방학은 시작되고 엄마들의 돌밥(돌아서면 밥)고행은 시작된다. 엄마들이 지칠때쯤 방학은 끝을 보이고 선생님의 일상은 새학기와 함께 다시 시작된다. 참으로 환상적인 보완 관계 아닌가!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나의 환상적인 방학은 8월부터 시작했고 이제 그 끝이 보이고 있다. 작년에 책을 내겠다고 다짐한 이후부터 책이 출간되어 여러 장소에서 북토크와 강연을 이어오는 동안 꽤나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지극히 좁은 대인관계에 만족하며 살던 내가 어느 순간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너무 많은 곳에서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어느 날 번쩍 들었다. 언젠가 부터 마치 쉼표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쉼표 없는 글을 읽는 것처럼 밤마다 숨이 찼다.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 목표는 오로지 쉼이었다.
쉼. 숨을 쉴 때도 쉼이고, 몸을 편안히 쉬게 하는 것도 쉼이다. 쉼의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쉼을 고민하며 알게 된 것은 쉼을 대하는 욕망의 변덕스러움이다. 곁에 사람이 많아 혼잡스러우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어 외로우면 사람이 그립다. 질문과 관심을 많이 받으면 간섭으로 느끼고, 무관심하면 서운함을 느낀다. 일이 많으면 쉬고 싶지만, 너무 쉬기만 하면 보람 없음에 무기력해진다. 어쩌면 인간은 본래 이렇게 일관성 없는 성향이 일관되게 반복되는 동물이 아닐까? 나 이상한 사람인가? 이상스러운 고민을 할 때쯤 이 그림책을 만났다.
어린 동생을 품에 안은채 묻고 또 물어대는 엄마, 아빠의 질문에 답하기 싫어진 오스카는 나무숲 속에 나만 아는, 아무 데로 찾아간다. 조용한 '아무 데'에서는 아무도 오스카에게 질문하지 않고 비난도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영원히 놀면 좋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정 반대. 어둠이 내리자 외로움의 끝에서 가족의 다정하고 따뜻한 말이 그리워지는 오스카. '아무 데'에 깊이 심취했던 때문인지 오스카는 돌아 나오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오스카가 '누군가'를 찾아 소리치자 살며시 다가오는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는 오스카와 닮았지만 다르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아무 데'에서 빠져나온 오스카는 밝은 얼굴로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긴다.
오스카는 이제 '나만 아는 아무 데'에 다시는 가지 않을까? 살다 보면 주변의 관심과 비난 어린 질문에 지치고 상처받는 어느 날은 또 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오스카는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그날을 잊고 다시 '아무 데'로 향할지 모른다. 괜찮다. 간절한 마음의 소리에 화답하는 고양이는 언제고 오스카의 손을 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 속도대로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한순간일 수도 있고, 어떤 시절일 수도 있다. 나에게 지난 봄은 찬란한 동시에 너무 눈부신 시간이었고 '아무 데'를 간절히 바라던 시간이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내게 쏟아졌던 호평과 혹평은 같은 무게로 나를 눌렀다. 늘 좋은 사람이고자 했던 오만함은 부족한 내면의 한계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 여름. 나는 오스카처럼 나만 아는 아무 데로 아무 계획 없이 숨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마음 가는 대로 보낸 시간을 가만히 돌아보니 그 안에 내가 계속하고 싶은 것과 그만하고 싶은 것, 내 부름에 나타나준 고양이가 다 들어있었다.
고양이가 내게 물었다.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뭘 하고 싶어? 일을 관둘 거야?'. 내게 그런 행운이 주어진다면 나는 사서와 작가일을 더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월급이나 수당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틈틈이 자주 휴가 내고, 운동도 조금 더 하고, 살림 등 자잘한 일은 외주 주면서 시간을 만들어 더 유용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다고 답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 당장 행운이 온듯 우선순위를 재 조정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내 속도대로 숨 쉬는 것이 편안해졌다.
세상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이 숨 막히던 여름도 입춘과 말복이라는 절기 앞에 고개를 숙인다. 결국 여름은 가고 가을은 온다. 영원히 '아무 데'에 머물 수는 없다. 쉼으로 충만해지는 순간 지루함과 그리움의 힘은 우리를 일상으로 돌려놓는다. 다행스러운점은 충분한 쉼을 가진 후 돌아온 일상은 감사함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선물 같아서 이전과 같은 곳이지만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여름은 또 세상을 집어삼킬 듯 돌아올 것이고 '아무 데'가 필요한 순간 역시 또 찾아올 수 있다. 그러면 잠시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아무 데'로 들어가자. 혹시 그 속에서 길을 잃는다 해도 그 덕에 만나게 될 고양이를 믿어보자. 고양이는 거울에 비친 나처럼 똑같아 보이지만 나보다 조금 더 나를 잘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려한 문장은 술술 넘어가는 구간과 자연스레 끊어 읽는 구간이 적절히 섞여있다. 귀에 착 감기는 음악도 아름다운 소리 사이사이 공기를 머금는 쉼표가 악보의 핵심 구성요소다. 무탈한 일상 역시 자연스러운 쉼이 적절히 공존해야 물흐르듯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우리는 특별한 무엇을 하지 않는 휴식을 불안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수많은 변명과 이유가 먼저 떠오를 테지만 불안은 직면할 때만 사라지는 것임을 잊지말자. 혹시 지금 당신에게 쉼이 필요한 때라면 망설임 없이 꼭 쥔 주먹을 펼치고 지금 갈 수 있는 '아무 데'를 찾아가 침잠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 #휴식 #휴가 #나만의동굴 #재충전 #번아웃 #따로또같이 #같이의소중함 #관심과집착사이
#일상을지키는힘 #불안과직면하기
➡️ 질문
� 가까운 이의 관심과 질문이 싫은 이유는 뭘까?
� 나는 언제 혼자이고 있고 싶은가?
� 혼자가 좋을 때와, 함께가 좋을 때의 차이는?
� 길 잃은 내가 우연히 만난 고양이는 무엇?
� 내 마음대로 살면 정말 좋기만 할까?
� 오직 나만을 위한 '아무 데'는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