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 RHK
넌 무엇을 기대했나?
임종을 예감하며 주인공 스토너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그리고 평온하게 숨을 멈춘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며 훗, 실소를 띄웠을 것 같은 그의 마지막 얼굴을 상상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 거대한 산 하나가 가슴을 메운 듯 웅장한 기분을 느꼈다. 한 남자의 전 생애를 지나치게 낱낱이 들여다본 것 같은 먹먹함을 어떤 언어로 풀어써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그의 마지막 질문이 밤 새 머리를 헤짚었다.
생을 다 바쳐 연구한 것들도, 집필한 책도, 안타까웠던 실수와 실패들도... 어떤 것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마지막 순간. 나는 저 질문에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오늘까지의 생을 두고 다시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고 있는가? 내가 해온 것, 행하고 있는 것, 하려는 것. 이것들 중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치 있을 무엇을 나는 하고 있는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와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스토너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스토너는 삶의 주체로서 능동적이었나? 수동적이었나? 이유는?
스토너에게 캐서린과의 만남은 이디스와의 만남과 어떻게 달랐나?
이디스는 결혼생활 내내 파괴적인 행동을 했는데, 왜 그랬을까?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캐서린은 왜 스토너에게 반했을까?
스토너가 이디스의 파괴적 행동에 수동적 인내와 침묵 말고 변화를 위한 시도와 적극적인 싸움을 했었다면 어땠을까? 혹시 딸의 결혼생활은 달랐을까?
스토너는 왜 캐서린과 떠나지 않았을까?
캐서린과의 관계에서 스토너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스토너가 '자신의 세상'이라고 표현했던 대학에서 그는 무엇을 찾았고, 무엇을 찾지 못했을까?
시골마을 분빌 외곽에 묻힌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저서를 쓰다듬으며 홀로 숨을 거둔 스토너의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스토너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내게 주어진 것인가? 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인가?
스토너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농대에 들어갔다가 영문학을 접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내 삶에서 그런 터닝포인트가 있었나?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스토너는 아들로서, 대학이라는 세상에서 교수로, 자신이 선택한 가정에서 책임감 있는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열심히 살다 죽었다. 세상이 기억해 줄 만한 위대한 업적이나 흔적은 없었지만 한 개인의 서사를 놓고 보면 우여곡절이 많았고, 고뇌와 갈등 속에 치열했고, 나름대로 묵묵히 고군분투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소설 속 주인공에게 마땅히 기대할만한 대단한 무엇 없이 어느 날 문득 암에 걸려 덜컥 죽음에 이르렀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오는 것 아니겠는가. 누가 감히 그의 삶이 쓸모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토너의 삶을 통해 독자는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어째 소설 속 주인공 답지 않게 심심한 두부맛 같은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역설적으로 오히려 내가 나에게 소설 속 주인공 같은 삶을 기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혹시 나는 내 인생이라는 소설 속에서 진짜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대단한 위업을 이뤄내는 주인공의 모습을 내게 기대하며 달려온 것은 아닌가? 그런데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그러한 기대가 진짜 내가 원하는 모습이 맞는가? 혹시 세상이 개인들에게 강요해 온 판타지는 아닐까? 어쩌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슴슴한 두부맛 같은 스토너만큼도 살아내지 못할 확률이 훨씬 높은데 말이다. 그런데 꼭 대단한 뭔가를 이뤄야 좋은 삶일까?
독자중에는 스토너가 불쌍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필 이디스 같은 여자를 만나서 일생 고생하고, 직장에서는 숙적 로맥스 교수와 퇴임할 때까지 모양 빠지는 멸시를 당하고, 처음 느끼는 사랑은 하필 불륜이고... 그저 묵묵히 순응하고 견디기만 하는 스토너가 답답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정말 그럴까? 스토너에게 주어진 환경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난 것도, 무식한 부모슬하에서 자란 것도, 전쟁이 터진 것도, 로맥스라는 숙적이 등장한 것도 다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장의 책임을 다 하했고,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과 위로 안에서 임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사랑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즐기며 학문연구에 몰입하고 성과를 내기도 했다.
삶은 그런 것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라. 불쌍하고 답답한 상황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찾을 수 없다. 생은 언제나 개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계획을 무너트리고, 의지를 꺾는 사건으로 좌절과 고통을 겪게 한다. 이것은 삶의 기본값이다. 스토너가 평안하게 눈감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삶의 기본값 앞에서 불평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스스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존엄한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 주인공답게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갈등해결을 위해 주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이야기 속 스토너의 행적은 그의 성향 안에서 최선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디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의 성장과정과 당시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감안해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무엇을 위해 살더라도 결국 후회는 피할 수 없다. 죽는 날까지 내 세상을 넓혀가며 그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이어질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율적 선택이다. 내가 선택한 곳에 가보고, 내가 원하는 것을 먹어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내가 궁금한 것을 겪어봐야 한다. 그 경험의 크기만큼이 내 세상이다.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언어의 크기만큼만 나는 존재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때문에 괴로워 말고, 통제 못할 미래 때문에 불안해 말고,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 지금 내 욕망.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리고, 현재를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