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생각 속을 걷는 법

| 여행이라 쓰고 문학기행이라 읽는다.

by 느닷

'심야비행'은 사서 선생님들과 4년째 이어오고 있는 독서모임이다. 같은 일을 하다보니 관심사도 비슷하고 같은 책을 읽으며 생각을 나누다 보니 삶을 바라보는 결도 닮아갔다. 우리는 어느덧 여행도 함께 다닐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지난 겨울에는 처음으로 1박 2일 부산여행을 계획했다. 보수동 책방거리, YES24 중고서점, 영도 흰여울 문화마을…. 모두들 평소 함께 가보고 싶었던 부산의 명소들을 신나게 읊었다.


그런데 막상 동선을 의논하다 보니 문제를 발견했다. 부산의 험한 교통매너를 감당할 만한 드라이브 실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 중에 한 명도 없다는 사실! 그렇다고 자가용 없이 1박 2일이라니, 요새 무릎도 시큰거리기 시작하는데,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고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모두들 자신이 없었다. 어려움의 크기를 한참 저울질 한 끝에 중년의 쫄보 5인은 결국 백팩을 메고 시외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지하철은 복잡하고 계단은 많을 텐데 겨울여행의 짐은 눈치 없이 컸다. 나는 짐을 쌀 때부터 소수정예의 필수품만을 챙기겠노라 다짐했다. 겨울 추위에 대적하기 위한 목도리와 뜨거운 물을 담을 텀블러는 필수. 기록을 위한 휴대용 키보드와 보조배터리 역시 필수품이라고 챙겼다.


모두가 같은 이유로 필수품만을 엄선해서 가방을 쌌는데 막상 가방을 열어보니 신기하게도 품목이 천차만별이었다. 샤워타월, 대형 화장품 파우치, 드라이용 롤빗, 우산, 유산균과 영양제, 과일, 일행에게 나눠줄 기념선물, 여분의 마스크, 두꺼운 책까지! 필수품이 정말 다양했다. 우리는 유리문에 반사되어 쏟아지는 햇살의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새삼 알아차렸다. 특히 가방은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 순서대로 가벼웠다. 내 가방은 무거운 쪽이었다.


짐 꾸리기는 힘들었지만 차를 운전하지 않으니 좋은 점도 많았다. 예전에 차로 이동할 때는 보지 못했던 소소한 풍경과 골목길 맛집들이 느리게 걷는 만큼 자세히 보였다. 술 한잔도 마음 편히 마실 수 있고 교통체증이나 주차장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물건을 사면 들고 다니기 힘들 테니 자연스레 물욕이 다스려지는 효과도 추가.


낯선 지하철 노선도를 더듬을 때마다 부산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듯한 긴장감과 설렘이 공존했다. 꼼꼼한 성격의 그녀는 의외로 길치였고, 과묵한 그녀는 길 찾기 선수였고, 화통한 그녀는 모르는 길을 자꾸 앞장서서 걸었고, 체력부자인 나는 걸음이 제일 느렸다. 걸음 속에서 발견하는 서로의 생경한 매력에 친밀도가 자꾸만 올라갔다.

들뜬 수다가 끊이지 않은 덕에 스마트워치에 14,000보라는 기록적인 도보 숫자가 찍혀도 지칠 틈이 없었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는 게 사춘기라 했던가? 갱년기의 앞 뒤에 서있는 여인들도 지지 않았다. 우리만의 속도로 걷는 걸음이 주는 여유를 주름진 눈가에 채워 넣고 바람에 머리카락만 나부껴도 까르르 까르르 웃어제꼈다. 아이 없이, 남편 없이, 업무 없이 오롯이 내 감정과 욕구에 집중하는 시간. 우리는 오랜만에 사춘기 소녀들처럼 반짝이며 밤을 지새웠다.


독서모임을 함께 한 세월만큼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책과 사유의 범위는 넓다. 지난밤 늦게까지 이어갔던 책 이야기로는 뭔가 부족했다. 이른 새벽 숙소 창밖에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며 퉁퉁 부은 눈으로 누군가 지난달 함께 읽은 책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 '일퍼센트'의 마지막 장에서 고급 아파트 유리창 밖을 감격스럽게 내다보던 주인공이 생각나네요."

"아…. 그 책, 홀로 남겨진 아들의 마지막 순간이 정말 안타까웠었어요."

“아들의 부모님이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후회를 했을까요?”

붉은 해를 가운데 두고 낮게 펼쳐진 구름과 해운대의 하얀 파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수평선을 부지런히 채워가는 장관을 함께 바라보며 길어 올리는 질문들.

"그런데 그 부모는 왜 그렇게까지 돈에 집착해야 했을까요?"

"극한의 가난을 경험한 사람의 선택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세수한 얼굴에 로션을 찍어 바르며 대화는 이어진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치 만큼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침식사를 위해 숙소 근처 유명한 빵집에서 빵과 커피를 주문했다. 어느새 대화 속 책의 제목이 바뀌었다.

"소식 들었어요? '죽이고 싶은 아이'가 영화로 나올 예정이라네요~"

달콤한 빵과 쌉싸름한 커피는 찰떡궁합이다. 커피 향은 고급스러웠고, 케이크는 특별한 식감을 선보였다. 이 집 정말 맛집이 분명하다!

"와! 그 소름 돋는 반전을 영상으로 표현하면 정말 극적일 것 같아요."

맛집 답게 이른 아침부터 작은 빵집은 금세 손님으로 붐볐지만 우리는 책수다에 빠져서 눈치채지 못했다.

"과연 범인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뿔싸!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다음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빵집을 나서서 영도 흰여울 문화마을을 향해 이동하면서 대화는 이어졌다.

"교감 선생님이 했던 말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교감 선생님이 뭐라고 했었죠?"


나는 그때 해운대를 걷고 있었던 것인지, 책 속을 걷고 있었던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걷던 이들이 나와 같은 생각 속을 걷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이도, 성격도, 삶의 여건도 다 다른 사람들. 이렇게 다른 존재들이 아카펠라팀의 화려한 하모니 같은 1박 2일을 연주했다. 이 협주팀의 일원이 되기로 결정한 그때의 나를 칭찬하고 싶다. 독서의 힘이 위대한 것인지, 여행이 주는 여유가 대단한 것인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모두가 격하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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