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이드러너가 주는 신뢰
사춘기 아들과 불꽃 튀는 의견조율 (이라 적고 다툼이라 읽을법한….)을 하고 나서 넝마가 된 멘털의 휴식을 위해 하릴없이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다. 맥락을 알수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2021년 도쿄 패럴림픽 100미터 육상경기 장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검은색 맹인 안대를 낀 그리스 국가대표선수는 주황색 조끼를 입은 가이드러너와 트러스트 스트링 (Trust String)으로 서로의 손을 연결한 채 완벽한 호흡으로 나란히 전력 질주를 한다. 둘의 손을 연결한 실은 팽팽했고, 발 네개의 보폭은 정확히 일치했으며, 넘어지거나 부딪히지 않고 네 개의 팔이 똑같이 앞뒤로 흔들렸다. 둘은 순식간에 결승점에 골인했다. 10초 88! 세계 신기록이자 패럴림픽 신기록이었다. 두 선수가 달리는 10초 88의 화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신뢰와 믿음’이 눈부셨다. 짧은 영상이 끝나자 코끝이 찡해지며 감정이 출렁였다.
눈을 감은채 친구의 손을 잡고 걷는 놀이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채로 친구의 안내에 의지해서 옮기는 발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전력질주는 커녕 내딛는 발걸음마다 두려움이 막아서기 일쑤다. 하물며 말도 없이 트러스트 스트링을 통해 전달되는 감각만으로 서로의 신호를 느끼며 전력질주를 하다니! 두 사람이 저만큼의 신뢰를 쌓아 올리기 위해 보냈을 고단한 시간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가이드러너는 최소한 맹인선수 보다 더 나은 체력과 기량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것은 쉽게 품을 수 있는 부담이 아니다. 매 순간 서로 믿고 배려하며 유심히 관찰하고 사랑해야 안심하고 전력질주를 할 수 있다. 둘 중 누구라도 의심을 품는 순간 손발이 어긋나고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트러스트 스트링을 꼭 쥐고 달리는 두 사람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서 만들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되 마음의 끈이 건강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서로를 오롯이 믿고 전력질주를 할 수 있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감각이 내게 갈길을 알려주지 못할 때, 믿고 함께 달려줄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가? 혹은 내 손은 그런 신뢰를 담고 있는가? 나는 학생들에게 그런 책과의 만남을 잘 주선하고 있는가? 짧은 영상은 내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불신은 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오해를 만들고 신뢰를 무너뜨린다. 방학 중 사춘기 아들의 휴대폰 사용시간은 엄마 입장에서 예민한 문제다. 일상에 지장이 생길까 염려하는 마음은 날카로운 잔소리가 되어 거실에 메아리쳤다. 아들이 그간 손 놓았던 책도 좀 읽으면서 방학을 알차게 잘 보내기를 바랐을 뿐인데 내 잔소리에는 ‘너는 결코 스스로 게임 시간을 조절할 능력이 없을 거야’라는 불신의 메시지만 담겨 있었다. 눈부신 신뢰는 커녕…. 아무래도 녀석들의 전력질주에 엄마손은 어림없을듯 싶다.
누구나 한번쯤 휴대폰에 등록된 연락처를 위아래로 훓으며 ‘그 사람’을 찾을 때가 있다. 친구, 동료, 연인, 부부, 가족도 좋지만 그들로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다. 혹은 그들 때문에 더 황폐해져 버린 부분이 있기도 하다. 내 감정과 고민을 나눌만한 사람, 내 성장을 자극해 줄만한 사람, 내가 품고있는 의문에 답 해줄만한 사람, 혹은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 속의 갈증을 해결해 줄 만한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터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딱 그 시간 그 곳에서 그를 만나는 것 또한 쉽지않은 일이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책’이 있지 않은가~!
변화가 필요한 순간마다 내가 가장 먼저 손 내밀었던 곳은 책이다. 사서가 된 뒤로 부족한 역량에 마음이 괴로울 때 우연히 ‘선물 / 스펜서 존슨 / 형선호 역 / RHK ’이라는 책을 만났다. 길잡이 삼을만한 책이 그렇게 떡하니 제때에 나타나 주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나는 매년 새해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트러스트스트링을 움켜쥐듯 흩어진 각오들을 다잡는다. 책이 하는 말들은 매번 흐트러진 나를 똑바로 일으켜 세워준다. 오늘 내딛을 발걸음의 방향을 알려준다. 책과 나 사이의 신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찾던 ‘그 사람’이 오랜시간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줄만한 답변을 상세히 적어놓은 것이 책이다. 언제든 필요할 때, 편할 때 읽어 보라고 친절하게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독서라는 것은 순서나 속도, 방향 모두 내 호흡에 맞출 수 있다. 뒷장부터 읽든, 중간만 읽든 상관없다. 심지어 몇번이고 내가 만족할 때 까지 다시 함께 뛰어준다. 책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화내는 법이 없다. 차량 네비게이션 만큼이나 친절하게 열 번이고 백번이고 다시 손을 내밀어 준다. 나와 맞지 않는다고 책장을 덮어버려도 결코 오해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찰떡같은 ‘그 사람’을 어디서 또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몰입해서 읽을 수록 나는 그 책과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
인터넷에도 무한히 많은 정보가 있다. 심지어 어마어마한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늘 최신이다. 24시간 열려있는 인터넷에서 구할 수 없는 정보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앞도, 뒤도, 중심도 없이 흘러가는 데이터 조각들이다. 그 속에서 성찰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수집된 데이터를 검열하고 재편집한 뒤 내 사고의 요구에 맞게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내게 의미있는 지식이 된다.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미 검증되고, 구조화되고, 완성되어진 책으로 먼저 지식을 습득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혹시 아직 믿을만한 가이드러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결코 뒤통수 때릴 리 없는 책에서 먼저 파트너를 찾아보시길 추천한다. 삶의 모든 갈림길 앞에서 마땅히 첫 번째 동반자로 삼을만한 ‘그사람’이다. 물론 아쉽게도 나는 아직 게임을 이길만 한 책을 찾지는 못했다. 큰아들은 여전히 와이파이와 스마트폰만 있으면 골방도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 친다. 하지만 그런 아들도 어느날은 분명 삶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될 터이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그 사람’이 필요한 어느 때는 수시로 오고야 만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게임에게 이기지 못 할 책을 읽고, 고르고,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