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개학을 앞둔 일주일 전. 겨울방학 동안 켜켜이 쌓인 먼지가 봄바람과 함께 사방으로 흩날리며 술렁이는 때다. 전근 오신 17명의 선생님 포함 모든 교직원들은 '새 학년맞이 교육과정 함께 세움 주간'을 시작했다. 2~5년에 한번 씩 근무지를 옮기는 교사의 직업 특성상 근무지를 옮겨서 낯선 사람들과 새로이 적응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서로 잘 알기에 기존 근무자들은 새로 오는 교직원들을 따스히 맞아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교장선생님이 꽃다발까지 준비하셔서 한사람, 한사람에게 열띤 환영의 인사를 건네셨지만 새로 오신분들의 경직된 어깨와 무릎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워크숍을 이끄는 선생님은 낯선 이들과의 첫 만남에 긴장한 우리 모두를 위해 차근차근 마음 열기 놀이를 시작했다.
입열기 쑥스러운 모두를 위해 작은 판에 각자 자신의 소개를 적고 보여주기.
그냥 적으라고 하면 힘들까 봐 형식도 정해주신다.
"저는 000할 때 가장 000한 000입니다."
요즘 글쓰기에 빠져사는 나는 고민 없이 쓱쓱 적었다.
“저는 읽고 쓰고 나눌 때 가장 행복한 사서입니다.”
각자 자신의 문장을 읽어주며 부연설명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입이 떨어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반짝이 스티커를 8개씩 받아 들고, 모두 일어서서 회의실을 돌아다니며 가위바위보를 했다.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스티커를 붙여주며 칭찬의 말을 건네는 놀이.
가위바위보에서 질 때마다 칭찬과 스티커가 계속 쌓인다.
제일 늦게까지 스티커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 승리.
상품도 푸짐하다~!
교직원 수가 90명이 넘는 큰 학교다 보니 새로 오신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이럴 때가 아니면 대화 나눌 기회가 없는 분들이 많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선생님들과 다짜고짜 가위바위보를 하고는 칭찬을 투척! 이게 뭐라고 순식간에 왁자지껄~ 폭소가 팡팡 터진다. 사서 선생님은 미소가 예쁘다는 칭찬에 주책없이 웃어버렸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슬금슬금 마음의 빗장이 풀어진다.
새로 오신 선생님께는 어떤 칭찬을 건네야 할지 난감해서 좀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꼭 가위바위보를 이겨버렸다.
"음… 인상이 좋으세요~" 그리고 또 이겼다.
"아… 어… 그 슬리퍼 정말 따뜻하겠네요~"
앗… 아니… 칭찬실패. 풉. 괜찮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어이없어 클클클 웃었다. 그렇게 두어개의 게임을 더 하고서야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검정, 회색, 빨강, 민트… 회의실을 가득 채운 선생님들의 다채로운 옷 색깔만큼 싱그러운 공기가 회의실을 편안히 감쌌다. 코로나 이후 제일 화려한 시작이다.
아직 겨울방학 기간이라 점심은 학교 인근 식당을 예약해서 활용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는 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다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없다. 교무행정원이 인원을 적당히 쪼개어서 식당을 배정해 주었다. 회의실 벽에 붙은 식당표를 보면 오늘 누구랑 어느 식당에 가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배정표에는 정성이 숨어있다. 사실 아무하고 아무 식당에 가는 것이 아니다. 동학년끼리, 비교과 선생님들끼리, 친분이 있는 선생님들이 찢어지지 않게, 새로 오신 분들을 같이 챙겨가는 역할을 할 사람도 콕. 콕. 어제, 오늘, 내일 가는 식당이 겹치지 않게 골고루 배정되어 있다. 우리는 정말 이 교무행정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매년 새 학년주간의 점심은 선물세트 같다.
이번에 새로 오신 보건, 상담, 특수실무원 선생님은 나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날씨가 좋네요~ 벌써 봄 같아요~ 어머 식당이 가깝네요~."
팥죽전문점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누는 시덥잖은 담소가 걸음의 보폭만큼 사람의 마음을 가깝게 만들어 준다. 먼저 와서 식사 중이신 교장, 교감 선생님 일행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는 멀찍이 잡는 센스는 기본!
학교에 여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날씬하거나 다이어트중이므로 음식 주문을 할 때는 5년차 근무자의 교통정리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 집은 칼국수도 팥죽도 양이 엄청나니까 소식좌라면 감안해서 주문하셔야 해요. 양이 적은 메뉴는 만두예요. 네~ 그럼 제가 만두를 시켜서 나눠드릴 테니 팥죽이랑 칼국수를 조금씩 덜어서 나눠먹기로 해요."
칼국수와 팥죽이 담겨 나오는 세숫대야같은 그릇을 보자마자 다들 나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요정도 교통정리는 해 줘야 5년차라 할 수 있는 법!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그리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돌아오는 동안 질문이 이어진다. 이전 학교의 경험, 새 학교에 대한 걱정과 기대 등이 내 대답과 뒤섞여 탐색전이 흥미진진하다.
오후라고 졸릴새는 없다. 지난 교육과정을 함께 톺아보며 새로 오신 선생님들의 새 학교에 대한 이해를 돕고 부서별 안내사항을 전달하느라 시간이 빠듯하다. 학년부장 선생님들은 작년에 열심히 운영했던 지난 1년의 교육과정들을 소개하며 목에 힘을 준다. 하지만 새 학기에도 작년과 똑같이 운영하자는 뜻은 아니다. 참고는 하되 새로운 경험과 아이디어, 날카로운 의견등을 끌어내기 위한 회의로 순서가 이어진다.
나는 선생님들이 회의실을 드나들며 구경할 수 있게 ‘경남독서한마당 공모전’ 선정도서들과 온책선정에 도움 될만한 자료들을 입구쪽에 미리 전시해 두었다. 그리고 부서별 안내 시간에 도서관 예약방법, 독서이력 관리와 찾아가는 북트럭, 상호대차 서비스 등 도서관 이용에 필요한 정보와 협조사항을 전달했다. 공모사업을 같이 할, 독서 동아리를 같이 할, 협력수업을 함께 할 선생님도 동시에 물색해야 하기에 최대한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새학년 맞이 주간은 은근히 설레면서 동시에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이곳에서 사서는 상담, 특수, 보건등 비교과 선생님들과 함께 업무협력팀에 속한다.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과의 수업준비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무실 부장선생님들과 함께 여러가지를 지원한다. 올해는 전근 오신 선생님들의 빠른 적응을 돕기 위해 자진해서 알.쓸.잡 유인물을 만들어 나눠주는 선생님도 있다. 건물이 3개나 되는 거대한 학교의 교실 배치도, 물품 구입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번, PC 고장 시 대처방법, 학교 와이파이 비번, 쓰레기 배출일, 전결규정 등 사소하지만 모르면 불편한 정보들이 꼼꼼히 적혀있었다.
나는 자진해서 매년 교직원들의 사진을 받아 얼굴과 이름, 학급이 매칭될 수 있게 A4용지 한 장에 정보를 정리해서 나눠준다. 이게 없으면 누가 누군지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우선 내가 너무 필요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교직원이 워낙 많아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일 년 내내 유용하다. 이러니 새학기는 다들 퇴근이 늦어지기 일쑤다.
교감선생님이 먼저 칼퇴근을 하며 본을 보이신다. 제발 그만 퇴근하라고 여기저기 잔소리를 던지신다. 쫗기듯 건성으로 네~ 네~ 대답만 할 뿐 키보드에서 손을 떼는 선생님은 별로 없다. 교내 메신저로 벌써 퇴근인사까지 나눴지만 욕심이 나를 놔주지 않는다. 조금만 더… 어… 요것만 마저… 아… 작은아들의 저녁밥 독촉 전화벨이 울리면 어쩔수 없이 남은 욕심은 내일의 나에게 전달하고 전원을 종료해야 한다.
여기 ‘행복학교’가 유난히 바쁘다는 소문이 있다. 내가 봤을때 소문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자발적 업무수행으로 인한 바쁨은 나쁘지 않다. 새 학기의 긴장과 기대가 뒤섞여 교실마다 회오리 치는 게 느껴진다. 그 속에서 함께 춤을 추는것 같다. 물론 내 감상과 판이하게 다른 평가를 하는 교직원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이렇게 느꼈다. 올해 새 학기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것인지 드디어 사서의 일에 적응한 것인지 일이 힘든데 왜 즐거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가물거리는 옛노래를 흥얼거리며 늦은 퇴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