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쓰까지 다 벗어줘도 괜찮다!

ㅣ연대와 나눔으로 '사람책'이 되어주세요

by 느닷

요리사를 꿈꾸는 작은 아들이 짬뽕 레시피를 알려주는 백종원의 영상을 보다 말고 질문했다.

"저 사람은 힘들게 자기만의 노하우와 레시피를 완성했을 텐데… 이렇게 상세하게 다 알려주면 다들 따라 해버려서 백종원 가게는 망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백종원의 영상이 널리 퍼져나갈수록 백종원에게 손해일까? 이득은 없을까? 그리고 자세히 알려주면 모두 백종원처럼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을까? 어렵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에 대해 알게 될수록 되려 그 전문가를 찾게 되지는 않을까?"

내 반문에 아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아들님을 보니 옛날 생각에 웃음이 났다.


'색동어머니회'라는 봉사단체의 회원이 되어 동화구연 봉사를 하러 온 동네 도서관이란 도서관은 다 돌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봉사하다 보니 어느새 동화구연 강사가 되어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은 봉사와는 차원이 다른 책임감을 요구했다. 문화센터 첫 출강을 앞두고 긴장되고, 걱정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프로그램 계획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활동은 어떤것이 적절할지, 시간 분배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초보티 팍팍 나던 그 시절에 선배 동화구연 강사들을 찾아가 어렵게 도움을 구했었다.


선배들의 강의에 함께 들어가 영상을 찍어서 다시 돌려보며 따라 해 보고, 샘플을 얻어다 밤새 교구를 베껴 만들기도 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자신만의 노하우를 그냥 술술 알려주는 사람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두 명의 선배님이 내게 기꺼이 경험을 나눠 주었다. 덕분에 모든 초보들이 거치는 다양한 고비들을 포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자 이제 내게 샘플을 빌리고, 조언을 구하는 후배 강사가 생겨났다. 나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내가 가진 동화자료와 수업의 경험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 재미와 보람이 나를 동화구연의 세계로 점점 깊이 끌고 들어갔다.


내 강의를 들을 아이들, 내 경험과 교구를 참고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뭐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고작 30분짜리 동화구연 강의를 준비하면서 밤을 꼴딱 새워 동화를 외우고, 교구를 만들고, 연습을 했다. 두 아들을 앉혀 놓고 시연까지 한 다음에야 수업에 나섰다. 그리고 강의 후에는 그날의 수업을 꼼꼼히 기록하며 복기했다. 그런 나를 보며 누군가 말했다. '아니 돈 얼마나 받는다고 그렇게 까지 해? 시간당으로 따지면 천원도 안 되겠다!' 그때는 그런 말도 나를 꺾을 수 없을 만큼 동화구연에 미쳐있었던 것 같다.


다들 꺼려하는 수업시연이나 동화 각색도 기꺼이 맡아서 했다. 공동 프로젝트 수업의 샘플도 먼저 만들어 공유했다. 도서관 동화구연 봉사가 펑크 나면 기꺼이 달려가 땜빵을 했다. 그러는 동안 실력이 슬슬 늘었다. 바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했던 나의 행동들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단순히 돈으로 계산하는 셈법이 통하지 않는 나눔과 연대라는 순기능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배웠다.


어느 순간 나는 전 연령을 커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화구연 강사가 되어있었다. 돌쟁이 아기와 부모님들이 함께 하는 영유아 수업부터, 시니어 수업까지 다 해봤고, 지적장애가 있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동화구연 봉사도 3년 넘게 진행할 만큼의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내가 가진 동화구연 자료는 그 누구의 것보다 방대하고 상세했다. 내게 수업 참관을 허락해 주었던 두 명의 선배는 우리 지역에서 최고의 동화구연 강사로 손꼽히는 명강사가 되어있었고, 나는 그 분들의 수업을 이어하는 강사가 되어 있었다.


작년에 경남 전담사서 연수에서 독서동아리 운영 경험을 공유할 사서를 찾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연수를 준비하던 담당 선생님은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아직 경험을 나눌만한 깜냥이 되지 않았지만 담당 선생님의 다급한 요청에 선뜻 수락을 했다. 쟁쟁한 사서 선배님들 앞에서 짧은 경험을 공유하려니 부족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나의 독서동아리 운영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하며 다양한 입장에서, 상세한 정보들을 준비했다.


부담감에 열흘정도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괜히 한다고 나서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며 내 오지랖에 여러날 후회의 밤을 보내고서야 겨우 강의준비를 마쳤다. 강의가 끝나자 내용이 정말 유용하다며 당장 현장에서 적용해 봐야겠다고 말하는 사서들이 제법 많았다. 자세히 알려줘서 고맙다고 하는 이도 있었고, 이렇게 까지 다 알려줘도 괜찮냐고 묻는 사서도 있었다. 당연히 괜찮다! 자세히 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빤쓰까지 다 벗어줘도 아깝지 않다. 많이 내어줄수록, 싹 다 내어줄수록 나는 더 많이 채워지고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글로 전달되는 '책'과 사람대 사람으로 전달되는 '사람책'. 첫 번째, 작가가 공들여 고민하고, 연구하고, 창작한 결과물들을 정갈히 매만져 글이나 그림에 담은 것을 '책'이라고 한다. '책'의 효용가치는 출간과 동시에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독자가 책을 선택해서 읽고, 감동하고, 변화한다면 독자는 성장하겠지만 그 사실이 작가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삶 속에서 유용했던 지혜와 경험을 사람에게 직접 전해주는 사람을 '사람책'이라고 부른다. 무언가에 몰입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특별한 컨텐츠가 있기 마련이다. 몇십년째 방앗간을 운영해오며 만들어온 철학, 외딴 마을 카페에 사람이 북적이게 만든 노하우, 시내버스로 수천명의 승객을 실어나르다 알게된 우리 동네의 특색. '사람책'은 요청하는 이만 있다면 남녀노소 누구나 될 수 있고 실시간 쌍방향 변화를 일으킨다. 독자의 반응이 곧장 작가에게 전해지고, 작가의 말에 독자의 생각이 변하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둘은 동시에 성장이 가능하다.

나는 사서로서 당신이 기꺼이 '사람책'이 되어보기를 권해본다. 혹은 '사람책'을 요청해 보시길. 어쩌면 이런 만남이 살만한 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을 터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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