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밥들의 새벽밥상

ㅣ 그림책모임 마려워짐 주의

by 느닷

직장인에게 새벽이란? 슴벅슴벅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나는 아침밥을 먹지도 않거니와 밥 먹을 시간은 잠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갖춘 직장인이다. 그런 내게 토요일 새벽이란 깊은 밤과 같이 귀하게 아껴가며 늦잠인 듯 휴식인 듯 즐겨야 하는 것이 국룰이다! 그런 내가 토요일 새벽 5시 50분에 소풍 가는 아이 마냥 눈을 번쩍 뜬 날이 있었다. 새벽 그림책 모임을 가기 위해서이다.


시작은 대략 이러했다.

“봄에는 ‘월아산 숲 속의 진주’가 참 좋대요”

“‘비봉산 다솔사’ 위쪽도 전망이 정말 멋있어요~”

“ ‘연암도서관 앞마당’에 등꽃이 말도 못 하게 예쁘더라고요”

‘우리자리’라는 모임장소에서 그림책 수다 도중 봄 풍경 제보가 이어지자 누군가 급 제안을 했다.

“그럼 우리 그 경치 좋은 곳에 가서 그림책을 함께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좋을 것 같긴 한데, 다들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걸요...”

“음... 토요일 새벽은 어때요? 그 시간은 보통 약속이 없으니~”


그렇게 그림책 독서동아리 ‘그림책강정’의 번외편이 마련되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만나면 되었지, 도대체 그 귀한 주말 새벽에 또 모임이라니! 다들 제정신이란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 빼고 대부분이 적극 동의했다. 나는 여러 번의 새벽모임을 흘려보냈지만 솔직히 무심하기는 어려웠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후기들이 극찬 일색이었기에. 결국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그럼 한번만...‘이라며 소심한 참석을 약속했었다.





사실 짧은 그림책을 읽고 두세 시간씩이나 할 이야기가 뭐가 있냐며 핀잔을 주는 이들도 있지만 참말로 모르시는 말씀이다. 그동안 우리가 함께 나눈 그림책들 속에는 우리의 웃음과, 슬픔, 고민과 행복들이 삶의 이름으로 녹아있었다. 글을 읽고, 그림을 보며, 다른 이의 감상을 들으면 좁았던 시야가 트이면서 생각이 다채로워지고, 공감하는 말들에 가슴이 따스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연스레 옆 사람에게 마음의 한 곁을 내어주게 되는 신기한 체험은 덤이다.


고작 그림책이라 말하면 안 된다. 자연, 환경, 이웃, 우리, 아이, 가족, 편견, 오해... 등등. 수많은 세상사의 거침없는 견해를 그 속에서 발견해 왔다. 오랜 시간 생각을 함께 나누다 보면 시나브로 서로의 좋은 결을 닮아가면서 점점 내면의 힘을 키워가는 모임이 된다. 그래서 '그림책강정'에 오래 참석하다 보면 자주 보는 튀밥들이 점점 멋있어 보이는 기 현상을 겪기도 한다.


아, 여기서 ‘튀밥’은 강정을 버무릴 때 주 재료로 사용하는 밥알을 튀긴 바로 그 ‘튀밥’으로, 우리끼리 '그림책 강정'에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들을 일컫는 애칭이기도 하다. 3명이 모인 날이든, 10명이 모인 날이든, 튀밥들과의 그림책 감상은 실패한 적이 없다. 그림책은 정답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튀밥들과의 책수다는 때로 해방감을 준다. 그러니 그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완연한 봄 언저리에 걸려있던 토요일의 이슬 가득한 새벽. 진주 월아산 '진주의 숲' 공연무대 한켠에 괜시리 들뜬 마음과 함께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마련했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예산지원을 받아 처음으로 ‘강무홍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기획하고 있던 차였다. ‘강무홍’ 동화작가님이 번역하거나, 창작한 책들을 톺아보기로 했다.



준비해 온 그림책과 함께 누군가 주섬주섬 삶은 감자를 한 무더기 내어 놓았다.

“새벽에 배고프실까 봐…"

그러자 그 옆에 누군가 배실배실 웃으며

“그래서 나는 계란프라이를…”

또 그 옆에 누군가가 갖지은 쌀밥을 담아 온 보온 그릇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러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줄줄이 사탕마냥 오이냉국, 열무김치, 과일, 식혜, 떡 등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일회용품을 대신할 텀블러, 마실 물과 음료, 집에서 쓰는 수저, 손수건 등이 마무리로 등장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순식간에 차려진 완벽한 새벽밥상 앞에서 “와하하하하하~!!!” 한참을 웃어제꼈다.




나는 단톡을 보면서 몇 명이 참석하는지 미리 확인하고 새벽에 그 인원이 먹을 만큼의 참외를 깎아 통에 담으며 소소한 선물을 나눌 생각에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을 즐겼었다. 그런데 그걸 나만 느낀 게 아니었다~! 튀밥님들에게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새벽밥상은 맛보기도 전에 이미 꿀맛같이 맛있고 따스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마음은 감동으로 촉촉이 적신 다음 시작한 그림책 감상은 다른 날 보다 몰입이 잘 되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 ‘아모스 할아버지가 버스를 놓친 날’, ‘조지 아저씨네 정원’까지는 잘 진행되다가 결국 ‘천사들의 행진’이라는 아픈 이야기책을 앞에 두고 다들 감정이 넘쳐버렸다. 다 큰 어른들이 그 아침에 숲 속 한가운데 둥그렇게 둘러앉아 훌쩍훌쩍 울어대는 모습이라니~. 시작할 때의 박장대소를 들었던 이가 우리의 우는 모습을 함께 봤다면 우리를 필시 이상한 사람들이라 했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게 대수랴! ‘천사들의 행진’은 너무너무 속상한 이야기였고, 우리는 핑핑 코를 풀며 '진주의 숲'에서 함께 펑펑 울어버렸다. 그렇게 순간순간의 감정에 마음 편히 민낯으로 마주하는 경험은 흔히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항상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다.






누구나 홀로 짊어진 각자의 짐이 있고, 보이는 이면의 그림자 하나쯤 안고 살기 마련이다. 나 역시 적지 않은 생채기를 품고 살아왔기에 낯선 이들과의 첫 대면은 늘 어렵고 조심스럽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특히 낯을 많이 가리는 소심쟁이였다. 먼저 다가가 말 붙이는 법을 모르고, 시작 전에 주저함이 길다. '그림책강정'에 처음 발을 들일 때도 겁을 많이 냈었다. 괜히 옆집 언니를 같이 끌고 갔을 정도로...


그런데 이 그림책이란 것이 참 신기한 물건이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곰곰이 들여다보게 해 주는 요술거울 같은 녀석이다. 게다가 그곳에는 채근하는 법 없이 푸근하면서도 뚝심 있게 끌어가는 리더가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따스히 위로받고 단단하게 치유되었다. 튀밥들은 서로에게 스미듯 강정으로 잘 버무려졌다. 새벽 밥상은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차려진 밥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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