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도 다르지 않아요
문방구 앞에서 랜덤 뽑기 기계에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뺑그르 돌리면 약 2, 3초간 뜸을 들이다가 정체 모를 장난감이 알록달록 동그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채 굴러 나온다. 새 학기 3월은 그 2, 3초간의 뜸같다. 아니 정체 모를 장난감에 설레이며 포장지를 뜯는 시간 같다. 작년의 운영 경험을 거울삼아 겨울방학 동안 가다듬은 새 학기 계획들을 도서관 구석구석에 펼쳐놓느라 봄이 오는지 가는지 아는 체 할 겨를이 없는 달이다.
학반이 정해지고 담임선생님과 아이들이 인사를 나눈 다음날부터 '학생 추천도서 영상'접수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중에 재미있었던 책 4권의 제목을 적어내면 추천인의 이름을 넣은 추천도서 영상을 만들어 본관 출입구에서 온종일 틀어주는 프로그램이다. 영상에 나온 책들은 대출도 잘 되었고, 추천한 학생들에게 책 내용을 질문하거나 추가로 추천을 요구하는 아이들이 더러 생기면서 작년에 제법 인기좋은 프로그램이 되었다. 책부심쟁이들은 아직 홍보도 하기전에 추천도서 영상에 자신의 이름을 새로이 올리고자 먼저 찾아왔다. 아마 다음 달쯤엔 따라쟁이들이 움직일 것이다. 샘쟁이들은 그 다음 달쯤 겨우 겨우 읽어낸 추천도서 목록을 들고 찾아올 터이다. 어떤 이유로 오든 대환영이다.
학생 도서부 모집도 시작했다. 홍보는 독서를 애정하는 학생 위주로 차분히. 도서관을 바지런히 드나드는 책부심쟁이들에게 넌지시 스카우트 제의를 하며 동아리 신청 접수대장을 내민다. 용지에는 동아리 활동에 대한 안내와 주의사항을 꼼꼼히 적어두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따라쟁이와 샘쟁이들이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신청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일 년 내내 후회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청단계에서 부터 신중한 고민을 권해야 한다.
* 수요일 아침 8시 40분까지 1학년 교실에 들어가 그림책 읽어주는 활동을 할 수 있습니까?
* 일주일에 하루. 쉬는시간에 도서관에 와서 대출/반납/정리 등의 봉사활동을 할 수 있나요?
* 중간에 동아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까?
* 자치부, 방송부등 다른 동아리와 중복신청 할 수 없습니다. 확인했나요?
* 동아리 시간에 약속한 책을 끝까지 읽어올 수 있나요?
체크리스트에 답을 하다 현타를 맞고는 슬며시 연필을 놓는 아이도 있다.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 보고 다시 오겠다고 한다. 새 학기가 되면 4 ~ 6학년 학생들은 새로운 동아리 선택을 놓고 결정의 그날까지 술렁인다. 직접 동아리를 개설하겠다며 멤버 영입을 위한 홍보를 하고 다니는 학생도 있고 삼삼오오 모여 어떤 동아리에 가입하는 게 좋을지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한번 선택하면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행복한 동아리 시간을 위해 아이들은 심사숙고를 거듭한다.
저학년은 참살이(년 2회의 학교축제) 기간에 선배들의 ‘동아리 결과물 발표’를 구경하면서 자신들의 4학년 동아리 생활을 마음껏 상상한다. 누구나 동아리 장이 되어 개설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질 수 있도록 ‘동아리 결과물 발표’가 필수사항이다. 선택은 최대한 민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가위바위보로 탈락해서 어쩔 수 없이 남는 자리 아무 데나 들어가는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즌이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결과물을 발표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담당 선생님들의 몫이다.
담당 선생님이 동아리 시간에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가르치거나, 끌어가지 않는다. 시간, 공간, 예산을 지원해 줄 뿐, 운영 주체는 전적으로 학생이다. 새 학기가 되면 온갖 동아리가 범람한다. 만화, 댄스, 마술, 외발자전거, 요리, 켈리, 요가, 줄넘기, 축구, 컵 쌓기, 소설 쓰기, 벽화 그리기…. 최고의 선택을 위해 학생들은 더없이 진지해진다. 방송부, 자치부, 도서부 등은 조금 예외적으로 담당 선생님이 동아리를 미리 만들어 놓고 학생들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지만 선택에 대한 자율과 책임의 무게는 동일하다.
아침 활동 시간에 교실에 들어와 그림책을 읽어 주는 도서부 선배의 모습을 보며 1, 2학년들은 멋있게 도서부 활동을 하는 자신의 5학년을 상상한다. 그러다 막상 5학년이 되면 다시 진지하게 고민한다.
‘진짜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치부도 멋있던데…. 만화부 활동도 해 보고 싶고…. 내 단짝은 무슨 동아리에 들어갈까?, 00가 도서부 들어간다고 하면 나도 도서부 할까?, 그런데 선생님~ 도서부는 뭐 하는 동아리예요?’
사서는 담임처럼 특정 학급을 담당하지 않다 보니 동아리 학생들과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그러니 어떤 아이들이 도서부에 들어올지 결정될 때까지 나도 덩달아 술렁인다. 사실 도서부는 동아리 활동 시간이 아니어도 누구든 원하면 쉬는 시간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지만, 이렇게 동아리 활동까지 함께 하는 학생들과 나는 특별히 더 돈독해진다.
교사들끼리도 동아리 시간이 있다. 수요일 오후에 두 시간. 학생들처럼 누구든 동아리를 개설할 수 있고 어느 동아리든 참여할 수 있다. 나는 매년 교사들을 위한 그림책 동아리를 끌어오고 있는데 작년에는 새 학기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멤버 영입을 못했고 친한 선생님 4명이 겨우 모여 단출한 동아리를 꾸렸었다. 올해는 교사 동아리 명단에 일찌감치 '그림책동아리'를 올려둔 덕에 무려 10명의 선생님이 모였다. 특별한 준비없이 그저 그림책 두어권과 간단한 간식을 챙겨서 만났다. 오늘 첫 교사 동아리 모임에서 작년에 함께 했던 한 선생님이 좌중을 둘러보며 감격하셨다.
"사서샘~ 우리 그림책 부흥에 성공했어요~!"
다 함께 박장대소한 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는 첫 그림책으로 ‘핑 / 아나카스티요 / 달리’을 함께 읽었다. 가는 말과 가는 마음은 내 몫이지만, 돌아오는 대답과 돌아오는 마음은 상대방의 몫임을 탁구에 빗대어 이야기 하는 따뜻한 그림책이다. 그림책을 읽고 난 뒤 돌아가며 소감을 나눴다.
이번 학기에 잠시 기간제로 일하게 된 보건 선생님이 업무와 연관해서 감상을 말하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툭 떨궜다. 새 업무에 적응하느라 너무 바쁘고 고단했는데 지금 갑자기 마음이 무장해제 되어 버렸단다. 그 지친 마음에 백번 공감하기에 다 함께 토닥여 준다는게 그만 눈물 바이러스가 사방으로 번져버렸다. 갑작스런 눈물바다가 웃겨서 웃다가 울다가 머쓱해서 과자를 한입 먹다가 우리는 서로 다정해졌다.
사실 선생님들은 일과 중에 너무 바빠서 한달에 한두번 겨우 모이는 동아리이지만, 바쁘기 때문에 더더욱 잠시라도 짬을 내어 동아리 시간에 참석을 하려고 한다. 그래야 일 이야기 말고 다른 대화도 나눠 볼 수 있고, 잠시 숨통 트이는 휴식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한, 두시간을 공유하고 나면 마음이 그렇게 포근하고 든든할 수 없다. 덕분에 학교 선생님들과 소통하는데 두려움 대신 다정한 마음을 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동아리 활동 역시 그 소중함이 어른들과 다르지 않기에 이번 3월에도 아이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