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동행카드
뜨겁고 축축한 여름날, 모두가 여름휴가 노래를 부르는데 나만은 한없이 늘어져 있다. 그동안 바빴다는 핑계로 여행이든 뭐든 어떤 것도 준비하지 않았지만 이번 여름휴가에 내가 집에 있는 것은 많은 부분이 내가 게으른 탓이다. 어딜가나 더운 요즘이니까 반쯤은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한동안 사무실 대소사로 시달린 터라 출근하지 않는 일주일만으로 충분히 평온하게 행복 할 것 같았다. 급하게 홍콩, 대만 등 가까운 곳에 갔더라도 좋았겠지만 거기도 더운 건 비슷할테고 숙소에서 쉬고 싶은 나는 앉아서 기와라도 깨야하는 사람으로서 굳이 관광을 하려고 했을 텐데 이런 강박을 내려놓아야 진짜 휴식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에도 역시 쉽지 않다.
일단 준비없이 휴가를 맞이해버린 나의 몸을 가만히 뉘여놓았더니 생각이 어지러워 잠도 안든다. 휴식을 줬더니 오히려 각성이 되었는지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요가 3회_ 요가원도 휴가라 늘 가던 패턴보다 하루씩 당겨서 목요일에 끝나버렸다. 출근을 하지 않으니 아침요가를 할 수 있었는데 아침요가 수업도 의외로 꽉차서 놀랐다. 나만 부지런한지 알았더니 역시 아직 멀었다. 거의 일어나자마자 몸이 덜 풀린 상태에서 요가를 해서 그런지 평소에 잘하던 동작도 따라하기가 힘들었다. 시계를 자꾸만 보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 요가를 하면서 가장 긴 한시간이었다. 아침운동을 한 성취감도 예전보다 덜했다. 역시 새로운 운동을 찾아야 할까. 내 마음이야 어찌됐든 이번주도 꾸역꾸역 3번 출석완료
피부과 1회_ 관리라면 관리인데 피부톤을 맞추는 토닝(Toning)이라는 걸 해봤다. 그동안 거슬리던 점도 몇 개 제거하고 기미나 주근깨도 피부톤에 맞추어서 연해졌다. 근데 이 피부의원이라는 곳이 내부적으로 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상담하시는 분이나 안내하시는 분이나 메시지에 답을 해주시는 분의 말씀이 다 달라서 조금 화가 날 뻔했다. 질문을 한번 하면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줘서 꼭 두 번 세 번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제과제빵 학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제발 한번에 알아듣게 설명에 좀 신경을 써주시길.
시네마 투어 2회_ 요즘 극장마다 영화관람쿠폰을 준다. 덕분에 좋아하는 영화들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는데 한편은 프랑스 영화를 선택했다. 나는 150일 듀오링고 연속학습생으로서 약간의 기대가 있었는데 좌절스럽게도 주인공들의 일상언어가 음절로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을린 사랑’에서는 간단한 말 몇 개는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하지만 영화는 재밌고 끔찍하고 우스꽝스러웠다. 프랑스영화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프랑스영화만의 어떤 유머코드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언어와 비슷해서 통통 튀거나 음율을 따라 웨이브를 타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영화는 ‘Materialist’ 한글로 적인 제목을 보고 무슨 단어인가 잠깐 생각했다. 아침영화라 단돈 3,000원에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재밌었다. 영어라 듣기에 편안했고 엔딩이 예측되는 면이 있지만 그렇게 흘러가서 다행이었다. 여자들보다 오히려 남자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았을까. 두 영화를 같은 극장에서 봤는데 그나마 사람이 덜 붐비는 곳이라 좋아하게 되었고 이미 다음에 볼 영화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카페, 샌드위치, 빵 투어_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가고싶었던 곳이 몇군데 있었다. 평소라면 저장만 해놓고 ‘다음에’하고 말았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나에게 시간이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가 숯불로 직접 커피콩을 볶아서 자제제작한 융드립으로 커피를 내려주는 카페, 커다란 계란 오믈렛이 통째로 들어간 에그샌드위치, 단호박, 리코타치즈, 당근라페 등 여러 가지 재료로 속이 꽉찬 샌드위치, 맛있는 빵이 많은 귀여운 베이커리 등 더 많이 있는데 일단 이렇게 가보기로 했다. 계란 샌드위치 집은 서둘렀어야 했는데 더워서 게으름 부리다가 결국 품절이었지만 두 번째 방문에 성공했고 할아버지 융드립 커피집에서는 코코넛쉐이크를 먹었지만 행복했다. 서울을 여행다니는 기분이 꽤 좋았다. 더워서 중간에 방에 들렀다가 갔었는데 내방이 마치 에어비앤비가 된 것 같았다. 버스타고 가는 길에 발견한 홍콩식 진한 밀크티 집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데 아주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내가 먹는 속도보다 냉장고에 빵이 쌓이는 속도가 더 빨라서 지금 냉장고가 빵장고가 되었지만 좋은 날이었다.
북캉스_ 이번에 휴가에 유일하게 미리 준비했던 건 책이었다. 해외에 간다면 책을 한권 챙기지만 이번엔 일주일이 몽땅 나의 시간이라 일단 종이책 3권, 전자책 2권 여유가 된다면 영어책 1권까지 출퇴근 핑계로 읽지 못한 책이나 마구 읽자는 계획이었다. 급하게 준비했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읽고 싶었던 책들을 다 빌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는 거의 두 달 넘게 기다린 책도 있었다. 그책은 역시 핫한 만큼 재밌어서 빠르게 완독이 가능했다. 드라마를 보다가 조금 부족해서 원작을 찾았던 ‘탄금’도 굉장히 만족스러웠고 히가시노 외에 새로운 미스터리, 추리소설 작가를 찾았는데 그의 소설을 읽는 중이다. 잠자기 전에 읽는데 마치 심야괴담회 보는 느낌이랄까.
휴가철 전후로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의 인사가 ‘휴가 때 어디가?’ 라든가 ‘휴가 때 뭐했어?’ 또는 ‘어디 다녀왔어?’ 등으로 정리된다. 그냥 인사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구절절하게 ‘내가 이래저래해서 표를 예약하지 못했고 이번 휴가는 휴가지만 어디에 가지는 않고 집에서 책만 읽었어요’라고 묻는 사람마다 변명을 늘어놓고 싶다가도 책만 읽었다고 하면 나를 지루하기만 한 사람으로 볼 것 같아서 비슷한 질문으로 돌려주든지 얼버무려버리든지. 어차피 중요한 질문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만은 ‘나는 이번 일주일을 헛되게 보내지 않았어’ 라고 크게 말하고 싶어서 지금 이렇게 했던 일을 복기 중이다.
그 와중에 ‘기와라도 깨’는데 크게 작용한 것이 ‘기후동행’ 카드이다. 이건 다니면 다닐수록 교통비를 쓰는 게 아니라 버는 느낌이라 집순이인 나같은 사람마저도 나가게 한다. 교통비 적게 쓰겠다고 회사 근처로 이사와 놓고 교통비를 더 쓰는 바람에 기후동행에 정착하게 되었다. 얼마 전엔 고양시에서도 연결되어 있어서 이 카드가 더 좋았다. 집순이도 집밖으로 나가기까지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나가면 온 세상을 즐거워 하는 편이라 이렇게 비자발적 동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짧고도 유익한 여름휴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