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현실의 경계
장례식장에 가는 결정을 내리는 것
장례식장에 맞는 옷을 입는 것
부의금을 챙기는 것
혼자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것
가까운 사람의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챙기는 오늘 나는 더이상 내가 어린 사람일 수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성장해서 장례식장에 가는 일이 생겨도 머뭇거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 듯하다. 하지만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타인의 경조사를 회피하면 안된다는 걸 알 정도로 사회화가 되었을 뿐이다. 특히 장례식은 더 가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가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서 그동안 어깨너머로 본 것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사무실에서 우르르 가거나 넘어가지도 않는 밥만 우물거리는 의무적으로 가는 그런 장례식장이 아니라 내가 진짜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스스로 가려고 결정한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더운 여름, 평범한 토요일, 오전부터 스터디 때문에 서둘렀다. 오늘 북클럽 첫날이고 책도 다 읽어서 멤버들만 괜찮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영어가 술술 나오는 날이길. 매번 스터디에 가기 전에 생각한다. 그런데 진짜 저번주 보다 저저번주 보다 잘 나와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영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알수가 없다. 어떤 날을 나도 놀랄만큼 잘하고 어떤 날은 바보가 된 것처럼 더듬거린다.
오늘은 치킨데이로 정한 날이었다. 배민에서 준 기한이 오늘까지인 쏘리쿠폰이 있었다. 영어북클럽 2시간, 영어회화 2시간, 총 4시간 동안 영어로 대화하는 일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든다. 영어스터디가 끝나면 비로소 온전한 나의 주말이 시작되는데 체력이 전소된 나에게 바싹한 치킨으로 보상하기로 했었다.
금요일에 부고 메세지를 받았을 때 솔직히 3초 정도는
'가야하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든다.하지만 곧바로 토요일 나의 일정과 조율했고 나의 휴식몇 시간만 양보하면 무리가 없겠다는 판단까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장례식이란 미리 언제 몇시에 가겠다고 말을 해야하는 건가 약속하지 않고 그냥 가는 건가 고민이 되었지만 따로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부고 메세지에 있는 일정을 보고 적당한 때에 가야하는 것 같은데 마침 내 일정과도 잘 맞았다. 다행이었다.
나의 휴식과 장례식 중에 장례식을 택하는 건 당연했다. 가까운 언니였고 그 누구도 아닌 모친상이었다. 부고 메세지를 몇번이나 확인했다. 70세. 어떤 병으로 투병 중이셨고 언니가 간병 중이라는 말을 덤덤하게 한 적이 있었다. 싫다거나 힘들다는 말은 없었다. 언니는 그냥 사실을 전달하는 화법을 가졌다. 쉽지 않았겠다는 건 나의 생각.
나도 친언니 간병을 한 적이 있다. 간병이라고 하기엔 그냥 병원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잔 정도지만 가족이 환자인 경우는 어떤 경우도 쉽지않다. 생각보다 어머님이 빨리 돌아가신 건 맞는 것 같다. 투병을 좀 더 하실 줄 알았는데 폐렴으로 병원에 계시다가 가셨다고 한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조금은 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섬망증상과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잠을 자는 것과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웠다고 했다.
나는 어렸을 때는 울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 커서 눈물이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데에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고 메세지를 봤을 때부터 조금씩 울컥한 상태가 되어버렸고 장례식장에 가서 까만 한복을 입고 있는 언니를 발견 했을 때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갑자기 울음이 나와서 언니가 언니의 가족들을 소개해주는데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 같다.
허둥지둥 부의금을 넣고 이름을 쓰고 목례를 드리고 언니 손만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가는 길 내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생각 했는데 당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동안 고생많았다는 말만 겨우 했다. 나는 잠깐 거기 있었는데 언니는 혼자 온 내가 신경쓰였는지 와줘서 고맙다고 다른 날 만나서 얘기 하자고 했다.
장례식장까지 이리저리 헤메서 먼길이 더 멀었는데 다 괜찮았다. 언니는 하룻밤만에 가족이 사라졌다. 그에 비해 내가 가진 모든 불평 불만은 다 소소해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 날씨가 더운 것
몸이 피곤한 것
길을 헤멘 것
벌레가 많은 것
버스가 안오는 것
휴식시간이 줄어든 것
치킨을 늦게 먹는 것
발령으로 직원이 바뀌는 것
스타벅스 의자 예약을 못하고 있는 것
나라는 사람은 얼마나 이상하고도 현실적인지 가족을 잃은 언니에게 과하게 동기화되어 슬프다가도 나에게도 언젠가는 닥칠 일이고 미리 학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언니가 힘들 때 힘이 되어주고 싶다가도 나도 언젠가 언니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하고 언니는 아직 미혼이니까 언니가 그동안 뿌리기만 했던 축의금을 이번에 회수할 수 있겠구나라는 미친 생각도 했다. 내가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은 아직도 빨갛고 누군가 툭치면 곧 울음이 나오는 상태다.
집에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서 치킨을 시켜놓고 우유와 복숭아를 사서 집에 도착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소금을 뿌리라고 했던가 버리라고 했던가. 집으로 곧장 가지말고 꼭 어디 들렀다 가라고 했던가, 팥을 던지라고 했던가. 온갖 무속 관련 미신이 떠올랐지만 지하철 타고 오느라 이미 사람들과 많이 부대꼈고 마트도 갔다왔으니 설사 귀신이 따라왔어도 너무 멀어서 중간에 포기했을 것 같았고 심지어 같이 왔다해도 나와 함께 해준다면 오히려 좋았다.
이제서야 온전한 나만의 시간, 다 큰 사람의 하루를 보낸 것 같은 느낌은 하루 일과를 모두 소화한 성취감인지, 장례식장에도 혼자 갈 수 있게된 효능감인지. 금방 울면서 슬픔을 나누고 온 주제에 이런 생각을 가져도 되는걸까. 나는 지극히도 개인적이구나. 오랜만에 체력적으로 아주 피곤한 하루를 보낸 덕분에 영화를 틀어놓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꾼 것 같다.
아차차. 모친상에 다녀왔으면서 나의 엄마에게 전화 한통도 안했네.........
내 소소한 걱정 중에 지금 이순간 가장 큰 걱정은 당장 팀원이 바뀌는 발령도 아니고 누구의 슬픔도 아니고 스타벅스 의자를 놓친 것만이라는 게, 멀쩡히 예약 했던 걸 취소해버린 내 손가락이라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타인과 나의 행복의 크기를 비교하면서 안도하는데 또 죄책감을 느끼고 오늘 밤 언니는 밥은 잘 먹었을까. 나의 엄마는 몇살이었지. 귀신은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