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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May 11. 2023

직무유기

마음까지 가난할 필요는 없었는데

당신이 판단했을 때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사람들만 사귀어라.  그들이 당신을 위해서 일하든. 당신이 그들을 위해서 일하든 간에

-칙필레이 매장에 새겨진 문구 中-




오늘도 하루 일과를 위해 정해진 시간 책상에 앉아 PC를 켰다. 켜자마자 메신저가 뜬다.

"어제 퇴근할 때 부장님 봤어? 아주 돈이 남아도나 봐. 아니 그렇게 어렵게 받아서 가져다준 스벅다이어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니까" "난 이런 거 안 쓴다는 거 아니야?"

된장 남이야 쓰든 말든. 매년 어렵게 그놈의 스벅다이어리를 받아서 가져다주면 안에 쿠폰만 쏙 빼고 버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알면서 해마다 다이어리를 갔다 바치는 저 사람도 문제 아닌가 싶었다. 아침부터 이런 시답잖은 말을 들어야 하다니 짜증이 확 밀려온다. 더욱이 그럴 여유도 없다. 일이 산더미인데 도대체 저양반은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왜 사사건건 이럴까 싶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지만 이런 사람과 나란히 앉아 종일 일을 해야 된다는 사실에 거의 매일 짜증이 났었다. 물론 그 부장이라는 사람은 인간적으로나 일적으로도 직장생활 중 유일하게 별로라고 생각한 상사유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시콜콜한 말까지 듣는 건 나에겐 쓸데없는 소모였다.


"아니 무슨 맨날 백화점식품관에서 장을 봤다고 자랑을 해. 재수 없게"

"난 이런 건 안 먹는다고 하더라. 아주 혼자 고~오~급 지셔"

남이사 백화점 가서 장을 보든. 우주 가서 살든 뭔 상관.  거의 매일 반복되다 보니 한 장소에 같이 있는 것이 참으로 불편했다. 하지만 한정된 공간에 소수인원으로 일을 하다 보니 의자를 뺄 수도 옮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부장이라는 사람은 물론 나에게도 개소리를 간혹 했다. "퇴근하고 식품매장 들러 딸기를 사야겠어. 나 딸기 좋아하잖아. 한 개에 엄청 비싸. 도차장은 애들도 있어서 이런 데서 장 못 보겠다. 그렇지?"  저 여자가 먹은 건 킹스베리딸기? 만년설딸기? 금박딸기? 이런 딸기!


비호감은 맞지만 아침부터 또는 종일을 이 사람 이야기로 강제도배 당하는 건 정말 싫었다. 예전 같으면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입바른 말이 튀어나왔을 건데. 지금은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메신저를 잠재우는 마음에 공간이 생겼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첫째를 출산하고 돌이 안 된 시점에 이 회사로 이직했다. 그리고 돌잔치를 했더랬다.

자로 잰 듯 일을 했다. 효율은 좋을지 몰라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었고 같이 일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몰랐다 사람들이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둘째에 대한 고민. 몇 년을 매일 같이 하다가 그래 가져 보자 결심하고, 어느덧 만삭이 됐다.

출산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지 두세 달쯤 되었을까. 


"과장님 그거 알아요? 둘째 낳고 부드러워지신 거. 사람 됐어요~" 용기 있는 누군가 선빵을 때렸고

"맞아요. 사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코러스를 했다.

크,,, 헉 사람이라니? 허물없었던 직원들이라 웃으며 넘긴 것도 있지만 그 말이 인정되니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때 알았다. 그동안 참 피곤하게 일했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될 것을. 이제 좀 화기 안락하게 해 볼까? 물론 그건 희망일 뿐이었다. 사람 어디 안 간다고 급하고 중한 것을 처리해야 될 때는 또다시 깐깐 모드 출현이다.


 지나고 보니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직장생활을 했던 것이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고, 미팅 때 헛소리로 시간낭비하는 인간 용서 안되고, 대안제시 없이 문제만 말하는 사람도 별로였다. 여유는 경제적인 여유만 필요한 건 아니었다. 긴 직장생활을 잘 버티려면 스스로를 돌보며 생활해야 했다. 방전되지 않도록.

나에게 물도 뿌려주고, 영양제도 놔주고, 해도 비춰주고.  물 흐르듯 실수도 그럴 수 있어. 생각해 주고. 물론 회사는 이런 여유를 부릴 만큼 그냥 두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분명 스스로 숨 공간을 만들고 가꿔야 했다.


돌아보니 그 무엇도 하지 않았었다. 나에 대한 직무유기다. 마음이 가난해서 나를 돌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스스로를 잘 보살폈다면 조금 더 즐겁고 행복하게 그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지금도 힘이 남아 있었을 텐데라는 자책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 집단은 분명 나오고 싶었던 곳이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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