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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Mar 13. 2024

남편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놈이었다.

일주일 뒤면 학교에 서류를 제출한다. 그 서류 몇 장만 내면 모두 끝난다. 자퇴도 마음먹기까지 어렵지만 정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간결하다.


여전히 마음은 그물망을 삐져나온 송곳처럼 날카롭다.

뭉툭해지려면 시간이 흘러야지 싶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끊임없이 잡음을 일으키다 결국 사고를 쳤다.


조그만 방하나를 도배하기 위해 여기저기 견적을 알아보던 남편이 물었다. "지난번 사랑이방 도배할 때 견적이 얼마였지? 한 50만 원 했나?"

며칠 째 이어지고 있는 앙칼진 목소리로 또 받아쳤다.

"50만 원 같은 소리 한다." 답을 하면서도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날 선 감정은 주체가 안 됐다.


"아니 그냥 물어본 건데, 그리고 기억이 잘 안 날 수 있고 도대체 말을 왜 자꾸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잘못한 걸 알면서도 세상 태평해 보이는 너란 인간이 미워 사과한마디 없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무슨 병인지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말보다는 그 순간 나약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빠라는 사람이 더럽게 태연하고 평화로워 보여서 짜증 나고 싫어.   나만 안달복달하고 살아야 하니' 괜한 마음속 생떼가 올라왔다. 그러다 이유 없이 삐딱선 타는 사람을 감당하느라 힘들었을 남편에게 금세 미안해졌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천근만근 무거운 입을 열었다. "미안해. 요즘 예민해서 자꾸 엉뚱한 데서 터져 나와"

"진짜 왜 그런지 궁금해서 그러니까 말 좀 해봐"

"일주일 뒤 서류를 내면 이제 진짜 끝나. 그런데 나는 그걸 마주할 자신이 아직도 없어"라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서럽게 울어댔다.


예전 같으면 서로에게 끝까지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또 그만큼 각자 상처가 되었을 게 뻔하다. 다른 부부에게는 일상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마음 표현이 힘들다. 여전히 연습해야 하는 숙제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서로 다듬어지고 있는 중이다.


"애들에게 이런 모습 보일 수 없으니 참아야 되고, 당신도 말은 안 하지만 속상할 텐데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아직 감당하기 힘드네" "왜 더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이제는 스스로 부딪히고 깨닫고 나가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걸 지켜보자니 마음이 너무 아파"


"왜 더 힘든 길이라 생각해?" 이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맞다. 오로지 이건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랑이에게는 그게 더 편한 길일지도 몰라. 인생이 실패한 것도 입시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또 대학이 아니더라도 수 없이 많은 길이 있어. 그러니 너무 안타깝게 생각 안 해도 돼. 아무 걱정할 것 없어"부인에 대한 안쓰러움과 평안을 찾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말의 공기로 느껴졌다.


"그동안 이보다 더 힘든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것도 다 겪어왔잖아. 지금 사랑이가 저렇게 자기 길을 고민하고 살고자 애쓰는 날이 올 거라 생각 못했잖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좋아" 이제 걷고 있는 아이를 보니 좀 뛰었으면 했고 뛰는 아이를 보니 좀 더 달렸으면 했다. 욕심에 가려 미쳐 잊어버린 걸 찾게 해 준 것이 고마웠다.


살면서 여러모로 진상이라 여겼던 남편이다.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결혼하고 변함없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쭉 진상의 모습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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