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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Oct 29. 2020

곰방대 문신

다섯 살이었는지 여섯 살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유치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샤워를 하고 있는 아빠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다세대 주택 끝 방이었던 우리 집은 골방으로 불리던 단칸방이었다. 지금처럼 욕실, 부엌 구분이 따로 없이 가스레인지가 올려져 있는 작은 싱크대와 내 무릎 높이 정도에 달려있던 수도가 전부이던 공간이어서 문을 열면 샤워를 하는 아빠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갑작스레 문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당황한 아빠는 몸을 돌려 내가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아빠 등에 그려져 있는 '갓과 곰방대' 그림의 문신을 보게 되었다. 어린 기억이라 몸에 그려진 그림도 신기했지만 왠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샤워를 끝내고 들어온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등에 그림 그거 뭐야? 

-음..., 이거는 아빠가 아픈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마디 주고받고 했던 것 같지만 아프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이후로 유치원 하교 길에 샤워하는 아빠를 마주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더 이상 나에게 그 문신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커가면서 확실히 그의 등에 있었던 것이 문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몇십 년 전의 사회 분위기상 왜 '아픔'이라고 말하고 숨기려고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열 살이 되던 해부터 신문배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모두가 먹고 살기 녹록지 않았던 시절 공부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지만 육 남매를 홀로 키우는 엄마에게 육성회비를 달라고 말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아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어수선했던 60년대의 열 살 꼬맹이가 발 디딘 첫 사회는 냉혹하다 못해 시릴 정도로 척박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술병으로 돌아가시고 없다. 학교는 안중에도 없던 엄마는 큰 누나, 작은 누나에게 돈을 벌어 올 것을 강요했다. 남편 복이 없다며 늘 혀를 차던 엄마에게 자식 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큰 누나는 술집 접대부로 일을 하다 만난 남자와 살림을 차린다며 나가 버렸고, 집안이 답답했던 작은 누나는 작은 공장에 취직을 하며 독립을 했다. 열 평 남짓한 집안에서 형과 나, 여동생 둘에 엄마까지 다섯 식구가 부대끼며 살아갔다.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살았다. 구질구질했던 나의 동네에선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 보단 코 묻은 돈이라도 벌기 위해 신문소, 우유배달 소를 전전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던 때였다. 그럼에도 공부만이 이 암담한 현실에서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임을 알았기에 호심탐탐 육성회비를 노리는 선생님의 눈치를 봐가면서라도 나는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제대로 된 연필 한 자루 없었지만 학교에서는 집에서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 선생님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게 조용히 없는 듯이 책상에 앉아 숨죽이며 수업을 듣던 어느 날 큰 소리로 나의 이름을 호명하시는 선생님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교단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일렬로 줄을 섰다. 매끈하게 사포질이 된 회초리가 손바닥이 아닌 앞머리를 가격했다. 머리 끝에서 전해지는 고통보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울러 퍼지던 매서운 공기가 얼굴을 더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그 뒤로 학교를 가지 않았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못난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고 더 이상 발길을 학교로 돌려주지 못했다. 가시거리가 먼 학문을 통한 성공보다 몸으로 뛰는 것이 훨씬 더 빨랐다. 힘들지만 뛰고 또 뛰었다. 작은 돈이지만 그 결과는 내 손에 쥐어졌다. 작은 성공을 맛본 뒤 학교로 돌아가는 길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 후 내가 스무 살이 넘어 아빠는 문신을 지우는 레이저 시술이 생겼을 때 살을 태운다는 고통을 참아가며 '아픔'이라고 칭하고 부끄럽게 생각했던 표상을 지워버렸다. 등을 꽉 채웠던 크기로 기억하는데 한 번에 되질 않아 여러 번 병원을 방문하면서까지 지우고 또 지우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시술을 했던 의사는 신음소리 한번 내질 않고 이렇게 잘 참는 환자는 처음 본다고 했단다. 레이저 열로 살을 태워가며 지우는, 아니 뜨거운 레이저 열로 문신을 따라 살을 태워 흉터로 덮어버리는 시술이라 엄청난 고통이라고 했지만 아빠는 눈만 질끈 감은채 받아냈을 것이다.


그가 언제 등에 문신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스물 초반 즈음 공부에 대한 갈증과 그 자리만 맴돌 것 같은 형편을 직시하며 방황으로 이어졌고, 방황을 상징하고 싶은 마음은 몸에 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선비의 '갓과 곰방대' 그림을 새기며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꿈꿨을지 않을까 예상할 뿐이다. 아빠에겐 그것이 표현대로 아픔이었고, 아픔을 더 큰 아픔으로 지워버렸다. 그것은 자국으로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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