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밀한 얘기, 그것도 나보다 나의 가족들에 관한 너무나 내밀한 얘기가 많아서 이 글을 밖으로 꺼내도 될지 많은 고민이 되었다. 혹시 마음 상하는 가족구성원이 있다면 나는 우리 가족에 대한 헌사로서 이 글을 적은 것이니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
뭐랄까.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울로 점철되어 있었다. 자기 확신은커녕 자기 의심이 주된 정서였고, 급작스런 불행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었다. 특히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그런 면이 더욱 강화되었다. 나의 기억 속 젊은 엄마는 언제든 곧 아플 것 같은 사람, 언제든 갑자기 떠날 것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존재했다. 엄마의 외모가 무척 아름답고 하얘서 연약한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엄마는 유난히 병과 죽음에 천착하는 면이 있었다.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엄마는 엄마의 부모님과 너무 많은 나이차 때문이었는지 4살 무렵부터 죽음이 무서워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형제인 둘째 외삼촌은 고등학교도 채 가지 못하고 배를 타러 나갔는데 엄마는 파도가 치는 바다를 보면서 오빠가 저녁이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때의 외삼촌은 그 맘 때 아이답지 않게 매우 우울하거나 표정이 없고 말수가 적었다고 했다. 4살의 엄마는 방에서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바다를 보며 혹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오빠를 기다렸다. 내 추측이지만은 이런 배경 때문에 엄마는 주변인의 죽음이나 병을 지나치게 두려워했고, 나는 왜인지 그런 엄마가 가장 먼저 나의 곁을 떠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식도 가지 않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 한 일은 기차 안내양이었고 월급에서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하고는 외할머니의 생활비와 손위형제들의 대학등록금에 부치고 매일 이동했다. 그러다 기차에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 역시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아빠들은 대부분 부풀린 무용담을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의 아빠는 자조적인 얘기를 늘어놓곤 했다. 소가 없어 소 대신 쟁기를 지고 밭을 갈다 근처 학교의 여학생들과 마주친 일, 강릉 주공아파트 공사판에서 노가다일을 한 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너무 배가 고파서 친척집까지 3시간을 걸어가서 밥을 얻어먹고 온 일, 과외금지조치 때 압구정현대아파트에서 입주가정교사를 한 일,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유소에 딸린 단칸방에서 지냈던 일은 아빠의 잦은 레퍼토리다. 아빠는 환갑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는 면이 있는데 아빠가 스스로를 함부로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너무 오래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아빠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렇게 하는 게 낫겠다.” 라고 돌려 말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그럴 때, “아니 아니, 아빠, 나은 거 말고 아빠가 정말 하고 싶은 걸 얘기해 줘.”라고 말한다. 아빠는 생존 이외의 것은 다소 쑥스러워한다.
기질적으로 우울하고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행복을 유예시키는 두 남녀가 만나 나와 동생들을 낳았다. 우리 역시 기질적으로 우울하고 행복을 유예시켰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두 남녀가 지나치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가난한 순간들도 종종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유복하게 보냈다는 사실이다. 대체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서 대학을 가고 일을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우울한 인간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외적인 조건 상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만 우울은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혼자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나와 함께 공상하고 글을 읽고 같은 공간에 있어주었다. 그럴 때면 방에 혼자 남아 가족들을 기다리는 4살의 엄마, 겨울에 처음 기차를 탄 19살의 엄마, 너무 배가 고파서 염치 불고하고 친척집까지 하염없이 걷는 대학생의 아빠가 어렴풋이 떠오르곤 했다. 상상 속의 이미지이지만 나는 몇 번이고 분명하게 보았다. 그런 이미지들을 보다보면 굉장히 서글퍼지고 어떤 면에서는 굴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부모는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우울한 사람이고, 나 역시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우울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이런 부모의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모에게 맹목적이던 유년기를 지나 사춘기 이후로는 자식도 부모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나의 부모님은 환경과 성격적 결함이 더해져 나이에 비해 미성숙한 부분이 많았다. 서로에게나 자식들에게나 많은 상처를 줬다. 스스로 학대하는 경우도 많았고,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대부분 누워서 TV를 보았다. 나는 엄마, 아빠 각자에게 얘기했다. ”엄마(혹은 아빠), 나도 이제 어른스러운 엄마(혹은 아빠)의 모습이 보고 싶어. “ 상담 선생님은 물어보셨다.
“그렇게 부모님이 미성숙하셔서 부모님께 상처받고도 예하 씨가 부모님을 그렇게까지 챙기는 이유는 뭘까요?”
“선생님, 저희 엄마, 아빠는 어른으로서는 너무 부족했지만 끝없는 사랑을 줬고요, 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스스로를 위해, 또 자식들을 위해 너무 열심히 살았어요. 저는 엄마, 아빠를 외면할 수가 없어요.”
아빠는 지방 MBC기자 생활을 16년 하고 회사에서 해고된 뒤 서울로 올라와서 재수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도시락 사업을 시작했다. 나와 둘째는 큰 고모댁의 군식구가 되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아빠는 공장의 간이침대에서 지냈다. 주말에 가끔 아빠가 큰 고모댁에 오거나 우리가 공장에 갔다. 언젠가는 학원에 아빠가 탑차를 끌고 나를 데리러 왔는데, 같이 수업을 들은 남학생과 함께 내려갔다가 마주쳤더니 아빠가 당황했다.
“인사해, 우리 아빠야. “
나는 그 친구를 조금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는데 아빠는 아빠가 이런 모습으로 데리러 와서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과했다. 나는 아빠가 방송사 기자여서 매일 TV에 나올 때나 탑차를 끌고 오는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말해줬다. 진심이었다.
뒤이어 전업주부이던 엄마도 서울에 올라와 빌라를 얻어 가족들이 함께 살게 됐고, 엄마가 아빠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가락시장에 가고, 하루 종일 일을 한 다음,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 고객 전화를 받거나 발주하거나 식단을 짜거나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도 일 얘기를 하고 의기투합하거나 싸웠다. 2006년에 일을 시작해서 2016년에 가족끼리 처음 태국여행을 갈 때까지 10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신들 본인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식들이 엄마, 아빠를 생각만 해도 괴로워질 정도로. 몇 년 전부터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주문을 받지 않지만 엄마는 영양사 자격증을 따겠다며 방통대 식품영양학과 4학년에 재학 중에 있고, 아빠는 챗GPT로 엄마의 공부를 도와주고 내 매장의 물류를 도맡는 식으로 지나치게 열심히 주말을 보내고 있다.
나는 오래도록 나의 부모에게 받은 것들을 곱씹었다. 우울하고 불안하고 슬프고 분노하고 그런 것들. 우리 부모도 돈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면. 아니, 조금이라도 지원이 가능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면. 덜 우울하고 불안하고 슬프고 분노하는 인간으로 자랐을 것이다. 그들의 경제적인 결핍이 아니라 정서적인 결핍에서 굉장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와서 느끼는 나의 부모가 나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분투하는 인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족을 설명하는 완벽한 접속사이다.
나의 할머니는 6.25 때 월남하여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지만 80살 넘어 검정고시를 보고 자식보다 어린 교수들 밑에서 20대와 수업을 듣고 대학교를 졸업했다. 칠순의 외삼촌들은 평생의 꿈이던 그림 공부를 하러 화실에 다니시는데 나에게 결혼선물로 해바라기 유화를 그려주셨다. 고모들은 직장에 다니면서 석사 학위를 따거나 교양을 위해 방통대 수업을 듣거나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다닌다. 넷째 고모부의 가구 공방에 큰고모, 셋째 고모, 넷째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촌동생이 모여 넷째 고모부가 초빙한 안현배 선생님의 서양미술사 수업을 듣고 있자면 우리 가족에게 흐르는 선연한 분투하는 인간의 피에 전율하게 된다. 나는 주변으로부터 꽤나 자주 디자인 전공자가 아닌지 의심을 받는데(일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거의 100%의 확률로) 내게 미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강릉에서 종합병원 3교대 근무를 마치고 주말마다 서울까지 온갖 전시회와 공연에 나를 데리고 다녔던 셋째 고모를 포함하여 나에게 많은 그림을 보여주신 모든 고모들과 명절에 만날 때면 나의 노트에 여러 동물들이나 캐릭터들을 그려주신 둘째 외삼촌과 친척언니들 덕분이다. 나는 친척들의 열성 덕택에 그림을 매우 잘 그리고, 미술을 사랑하는 자영업자로 자라났다.
나의 가족들은 분투하는 인간을 나에게 유산으로 주었다. 조금 더 알고 배우고 싶은 열망, 경제적으로 더 벌고 싶은 욕망,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희망. 우울한 기질을 타고 나 비관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행복해지겠다는 결심이 나의 가족에게 흐르는 피다. 상담 선생님은 부모가 자식에게 명령을 물려준다고 했다. 최고가 돼라, 돈을 많이 벌어라, 항상 웃어라 등등. 나의 부모가 물려준 명령은 명확하다고도 했다. 항상 열심히 해라. 나의 가족들이 서로에게 주문한 것은 무엇보다도 항상 전력투구하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괴로운 적도 많았다. 선생님도 예하씨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이 명령이라고 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나를 24시간, 1분 1초도 쉬지 않고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나 게으른데, 나는 나의 부모만큼 열심히 살지 못하는데, 하는 자괴감이 나를 짓눌렀다. 선생님은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어요.” 혹은 “조금 덜 열심히 해도 돼요.”라고 했지만 둘째가 “언니, 도도 게시물에 거의 다 ’열심히 하겠다.’는 말이 들어가 있는 거 알아? "라고 했다. 그 쯤이면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인정하거나 조금 덜 열심히 살기로 결심하긴 어렵게 된다. 나에게는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거나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객관적인 수치로 나의 부모의 노력을 환원할 수는 없지만 현재 50여 명의 월급을 주는 중소기업의 대표와 이사로서 20년 가까이 회사를 운영해 온 것만 봐도 대단하다. 둘은 그 20년 동안 더 크게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종종 속상해 하지만 나는 나의 가게까지 그들의 연혁으로 여기고 있다. 나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종종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 질문을 받고 “식품 제조업을 하세요.”라고 답하면 돌아오는 답은 항상 “아, 어쩐지.” 혹은 “역시.”이다.
아빠와 엄마의 집안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자리 잡고 동생들을 서울의 대학에 보내고 보살폈던 큰고모와 큰 고모부, 고등학교도 가지 않고 배를 타고 손가락 두 개를 잃으면서 가족의 생활비를 벌어 온 둘째 외삼촌을 위시하여 전력투구하면서 살아남았다. 이런 어른들의 신화적인 이야기는 각 가족구성원들에게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압력으로 존재했다고 생각했다. 사촌들끼리 모이면 투덜거리거나 원망하기도 했다. '왜들 그렇게까지 열심히 사셔가지고...' 그러나 분투하는 인간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땅에 발 붙은 이 강렬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을까. 정신적으로 다 탈진해서 포기하고 싶더라도 다시 곧 간절해질 수 있었을까. 뒤돌아서 세어본 부족한 성취를 온몸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스스로 일과 책임감에 몰아넣고 왜 내 인생은 이렇게까지 고달파야 할까, 이 정도로 힘들 필요는 없는데, 하고 억울할 생각이 들기도 한다. 24년 7월의 어느 날은 4호점과 백화점 팝업과 타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 행사의 오픈일이 공교롭게도 모두 겹치면서 며칠 밤을 꼬박 새웠음에도 산산이 부서진 완성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엄마, 아빠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굴을 못 쳐다봤다. 엄마가 둘째 동생에게 "예하한테 포기하고 좀 그런 것도 가르쳤어야 했는데, 무턱대고 일을 다 받아내는 것만 가르쳤어. 엄마가 저렇게 키운 것 같다."라고 했단다. 맞다. 부모는 나에게 조금 쉬거나, 어떤 것은 조금 포기하거나 하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걸 배웠어야 했는데.. 하지만 틈바구니로 반짝하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언제 힘들었었냐는 듯 득달같이 달려들게 된다.
나도 내가 조금 덜 비장하고, 덜 간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계속 같은 속도로 달릴 수도 없는데, 100m 달리기 하듯이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100m 달리기 하다가 퍼지고 자괴감 느끼면서 다시 또 전력질주하는 무한반복에 신물이 난다. 그러나 내가 물려받은 것이 쉬고, 안 되는 건 포기하고, 마음 편하고 그런 것들이 아니다. 66세의 아버지와 59세의 어머니도 옆 트랙에서 전력질주 중인데 자식인 내가 쉬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울면서 같이 달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차피 달려야 하는 김에 나의 회사도 남들 보기에 대단하게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객관적인 성취로 가족들의 분투가 치하되었으면 좋겠다.
장사를 시작한 2018년도 이후 매 순간 힘들었지만 어쨌든 다 지나가서 여기까지 왔다. 지나온 고비들을 생각하면 내가 물려받은 것들을 떠올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내가 받은 유산들이 아니었다면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물려받은 것이 아주 많기 때문에 잘 버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잘 해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종종 지옥으로 몰아넣는 이 성격에 슬슬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부모 두 사람이 20년 간 이룬 것도, 물려줄 것도 별로 없다고 한탄할 때, 그들이 회사 이외에 또 무엇을 이루고 물려줬는지 깨달았으면 하고 설명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식들에게 엄청난 것들을 증여했는데.. 그래서 나는 누가 봐도 대단한 회사와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신형순과 송은하, 두 사람이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