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피곤해서 잠마저 오지 않는 새벽... 애써 잠들기를 포기하고 다시 유튜브를 틀었다. 목적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책을 읽어주는' 유튜브를 보게 됐다. 그리고 문득 올해는 책을 정말 안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도 습관인데...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미루다 보니 욕심부려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들이 침대 옆 서랍 위에 먼지와 함께 쌓여있지만 마음만 불편할 뿐 책을 읽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
조금의 죄책감을 덜기 위에 유튜브 속 목차 리스트를 훑었다. 점점 뻑뻑해지는 눈을 비비며, 단지 잠들기 위한 수단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빨강 머리 앤이 하는 말>이라는 책의 서두를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조곤조곤 읊어주는 책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보잘것없던 지금의 이 시간들이 다르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초록이되고 나서야 앤은 자신의 빨강 머리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는걸 깨닫는다.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게 하는 힘 아닐까? " - <빨강 머리 앤이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하는 말> 백영옥 作 중에서 -
그리고 문득, 그 책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오히라 미쓰요 作
스무 살, 1년 가까이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 이전까지 내가 마음을 쏟았었던 사람들은 모두 바빴다. 그들에겐 각자의 삶이 있었다.
그 시간 속의 나는 내 삶이 버거워 그들의 삶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원망스러웠다.
그 시간 속의 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따뜻한 말과 위로들은 그저 동정과 위선처럼 느껴졌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몰랐지만 살아있었고,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던 세상은 계속해서 쉼 없이 돌아갔다.
그때 우연히 저 책을 읽게 됐다. 단지 책일 뿐인데...
뭐가 그렇게 위로가 됐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나도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저 책을 읽었을 때
그때의 그 감정들을 오롯이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책이다.
어쩌면 당시에는 나도 몰랐던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저 책이 들려줬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에세이집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한때는 열심히 읽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뻔한 말처럼, 잔소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너무도 뻔하고 익숙한 말들이, 글들이, 이미 알고 있던 정답들이... 놀랍도록 가슴을 휘젓고 들어와 꽂힐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