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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Nov 29. 2020

오랫동안 알던 사람이 낯설게 느껴질 때

: 민낯은 쓰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7개월간의 드라마 촬영이 끝났다. 촬영이 끝났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고, 아직 정리할 일들은 산더미지만 당장의 큰 고비들은 모두 지나갔다. 그리고 어제는 그동안 함께 했던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이제 사무실에는 나를 포함 3명만 남게 되었다. 북적거리던 사무실이 히터 소리만 윙윙~ 울려서인지 무언가 어색하다 느낄 때쯤.

 

"커피 마시면서 잠깐 이야기 좀 할까?"

A가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A와 그동안 정신없다는 핑계로 못다한 이야기들을 쏟아붓다 보니 어색했던 사무실 분위기의 원인도 알 수 있었다. A가 드라마가 끝난 지금 가장 후회하는 일이 B를 이 드라마에 데리고 온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A와 남은 한 사람 B의 관계가 이미 깨진 유리조각을 간신이 붙여 놓은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A와 B는 이 드라마를 하기 전부터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옆에서 보기 부러울 만큼 B를 향한 A의 애정은 남달랐고, B 또한 A가 힘들까 먼저 궂은일을 자처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두 사람의 유대는 형식적이라 생각할 수 있는 직장동료가 아니라 살 비비며 살아온 가족만큼 끈끈해 보였다.


'오랫동안 봤는데도, 내가 그동안 B를 잘 몰랐던 거 같아'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서로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것이었을 텐데...

힘들 때마다 해주던 조언이 그저 잔소리로만 들리고, '왜 내 힘듦을 몰라주는 건지!' 하는 생각만 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서서히 스며들듯 원래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 내가 미처 모르던 그 사람의 민낯을 보게 된다.


아무리 아끼던 유리잔이라고 해도

이미 금이 가고 나면 다시 붙인다한들 쓸 수가 없어진다.

지금의 A와 B처럼 말이다.




사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0대에 만나 스무 살이 넘어 친구는 대학생이 되고, 나는 직장인이 되고- 시간이 흘러 친구가 직장인이 되고, 나는 영화인이 되고-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각자가 사는 세상' 속에서 점점 만나는 시간은 줄었지만... 같은 일을 하며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직장동료보다 1년에 한두 번 보지만 어제 만났던 것처럼 편한- 볼꼴 못볼꼴 다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결혼을  우리의 관계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것처럼 친구의 결혼식날 느낌 그대로 친구의 시댁은 드라마에서 볼법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부당한 시월드를 향한 쏟아지는 원망과 독박 육아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계속 반복하며 친구는 점점 변해갔다. 그런 친구가 안타까워 나름의 대책을 고민하고 이야기하면- 친구는 '결혼도 못한 네가, 남편도 없는 네가, 아이도 없는 네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 라며 한숨만 쉬었다.


'오래 봤는데도, 나는 그동안 친구를 잘 몰랐던 것 같다'

10대부터 30대까지... 긴 시간 동안 발 디디는 세상이 다른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원래 내가 알던 친구가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고,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묻지만 지금의 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는 일이 꼭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업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슬프기만 하다.




원래 잘 알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낯설게 느껴질 사실 이 드라마를 하면서 알게 된  내 모습도 그렇다.


지금은 떠나고 없지만 그가 떠나기 마지막 즈음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있는 사무실인데도 불구하고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나보다 직급이 높았던 그가 어이없는 일을 시켜서라기보다 당연히 해야 할 기본적인 업무도 못하면서 윗사람들이 있을 때만 일하는 척, 힘든척하는 것이... 업체에 줘야 하는 돈은 몇 개월씩이나 쌓아두고, 자기 과태료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구구절절 늘여놓는 사유서까지 써서 받으려는 그를 보며 그동안 싫었던 마음들이 쌓이고 쌓였다가 봇물 터지듯 터진 것이다.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나올 것 같아 말을 참았지만-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목소리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와서는 잠을 못 잤다.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찾았다. '그래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에!!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에 나에게 몹시 화가 났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어차피 지금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보지 않으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어떤 경우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게 사회생활이라는 것도 안다. 그리고 그동안 그 선들을 나름대로 잘 지키면서 살아왔기에... 그동안 나는 나란 사람이 원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애써 감추면서 사느라 미처 몰랐던 내 민낯은 생각보다 더 하찮았다.


그러니까 '원래 알던 사람'이라는 건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그런 사람일 거라고.

그 사람을, 그리고 나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민낯은 너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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