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작품을 할 때 늘 짜증을 내던 부장이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면서 그의 짜증은 참기 힘들 정도로 심해졌고, 촬영이 끝날 때쯤 사람들은 그 부장과 되도록 부딪히지 않도록 피해 다녔다. 나는 그 부장이 원래 성격이 그런 걸 수도 있고, 유독 더위를 못 참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장의 몸에 알 수 없는 염증이 번져서 당장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도 작품을 끝까지 마무리하려고 입원을 미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싫어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를 알게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해도 좋아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싫어진다. 물론 그 사람이 아팠다는 사실이! 애먼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불편함을 주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순 없지만... 그래도 그때, 그 사람이 아팠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조금은 덜 미워하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일을 하다 보면 일이 힘들 때보다 사람이 힘들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유독 사람이 힘든 작품을 하고 난 후, 느끼게 되는 건... 그 사람이 '싫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했던내 마음 때문에 더 힘들었던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일이지만... 싫은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미운 마음도 조금은 사그라든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일하는 법을, 덜 미워하는 법을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만나면 어떡해야 할까?
거짓말과 이간질을 하는 사람
그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무전기 속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모두가 듣고 있는 무전기에 유독 한 친구에게 함부로 대하며 모욕감을 주고 있었다.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불편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가 큰 실수를 했단다.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단다. 그런데 그럼 밖으로 불러서 화를 내던! 혼을 내던!! 했으면 좋을 텐데...
이해하기 힘든 일들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그가 과하다 싶을 정도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감정조절이 잘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 날이면 숨이 막혔다. 나는 그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일들은 없었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체한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럴까?
그에 대해 궁금해하다 보니 그와 작품을 했던 친구로부터 그가 이전 작품들에서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나 오랜 시간 함께 일하다 보니 그 사람들과 비슷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의 '사적인 이야기'를 알고 나니, 그의 행동은 싫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가 '누군가의 탓'을 하며 힘듦을 토로할 때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백히 제작팀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자 급기야 그는 팀원들 탓을 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일을 너무 못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거라고...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부장이 뭐 그리 대단한 권력이라고. 부장이라는 이유로 시키기만 하고, 경험 없는 팀원들에게 떠넘기고 술만 마시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제의 원인이 결코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윗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크게 질타를 받은 그는 며칠 동안 침묵했다. 그렇게 반성을 하는 줄 알았으나 이후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반성하는 줄 알았던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상황을 각색하기 시작했고, 각색된 상황은 어느새 그에게 있어서 진실이 된 듯 보였다. 그는 본인이 만든 그 진실 속에서 억울한 피해자였다. 오히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이대로 억울한 피해자가 될 순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붙잡고 자신의 억울함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 억울함의 호소는 오히려 그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편을 만들기 위해 뻔한 거짓말들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라고 의심하지 못했으나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확인을 해보면, 그의 말들은 너무 쉽게 들키고 마는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를 물었을 때... 그는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지 못하는 듯 태연하게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다들 내 말을 들으니까!라고 이야기했단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러자 이 모든 일들을 탓할 상대를 정하고 이번엔 왕따를 조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갖은 권력을 이용해 그 사람과 말이라도 할라치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경계하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만나면.
영화일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직업이다 보니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면,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작품은 달라지지만 하는 일들은 비슷하게 반복한다. 하지만 그 비슷한 일들도 '누구'와 하느냐! 에 따라 전혀 다른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라는 기대, 설렘 그리고 두려움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번 작품을 하고 나니 기대,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그 친구가 '리플리 증후군'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란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욕구 불만족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본인의 상습적인 거짓말을 진실인 것으로 믿고, 이 거짓말은 단순한 거짓말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단다. 타인에게 심각한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입힐 위험이 높아진다고 한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아픈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영화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이라고. 그가 일 잘하고 성격 좋기로 소문난 녀석의 남편이라고... 이런저런 이유들을 찾아가며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마음'이 도무지 받아들이려고 하질 않았다.
그동안 착한 척하지만 착하지 않은 사람, 남 탓만 하는 사람, 술만 먹는 사람, 남의돈을 내 돈처럼 쓰는 사람 등등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겪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했었는데... 이토록 싫은 사람은 처음이라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붙잡고 이야기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대화도, 싸움도 말이 통해야 하는 건데 그는 어디로 튈지 예상을 못해 결국 피하는 법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서 고민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언제든지 그와 같은 사람을, 그보다 더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피해야 할까?
어쩌면 이 글 또한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