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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Dec 31. 2019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 '왕따'가 있었다.


나는 자존심은 세지만 자존감은 낮은 아이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반이 배정되면 늘 '혼자 있게 되진 않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먼저 말을 걸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함께 밥을 먹고, 하교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게 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화일을 시작하면서는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일은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이고, 그중 제작파트는 그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자존감이 낮은 나라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맞추면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다.


내가 영화일을 계속하는 걸 보고, 친구들은 '도대체 네가 어떻게 그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나도 순간순간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걸까?' 생각한다. 그런데 일 때문에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만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지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작품에서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글을 통해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왕따'에 대해서 보고 들으면서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있지만, 막연하게 나는 그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다. 




 '왕따'가 있었다. 


왕따를 조장하는 사람은 '나의 상사'였다. 그녀도 처음엔 피해자였다. A는 상사만큼 작품을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A는 그 책임을 다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결국 A의 미숙함은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상사는 그 뒤치다꺼리를 감내야 해야 했다. 그런데도 A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밤새워 일하는 건 상사여야 했고, 그 공을 고스란히 가져가는 건 A였다.


처음엔 상사도 영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성이 아닌 감성이 뇌를 지배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만큼 A를 향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상사가 A에게 욕이나 폭력을 가한 건 아니다. 단지 A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A가 다른 스태프들과 이야기하면 그 스태프들까지 비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도 A의 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A도 나의 상사만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A는 회피하는 걸로 상황을 모면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하는 작업이다 보니 A가 회피할수록 더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A는 순수하고, 착했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순수함은 무지로 다가왔고, 사람들은 A의 무지를 힘들어했다. 그런데도 A는 '괜찮다'라고 상황을 모른 척했다. 그렇게 A는 스스로 자기편을 만들기보다 혼자 남기를 선택한 것 같았다. 

 

나는 나의 상사와 A를 잘 연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A는 '대화'가 어려운 사람이었고, 상사는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두 사람은 나보다 직책이 높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저 A를 지켜보고, 상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A가 분명 원인을 제공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상사의 방식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 작품이 끝날 때까지 우리 세 사람은 각자의 지옥에서 살아야 했다.




이런 사람들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왕따를 시키는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나의 상사는 똑똑한 사람이다. 영화판에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불합리함에 대해서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부딪혀보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안되더라도 더 재밌게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그렇다. 눈치챘겠지만 A는 감독이다. 10년 넘게 영화 현장에서 죽어라 일해도 감독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A는 시나리오를 쓰는 재능 하나로, 상업영화 현장을 경험하지 않고 입봉 할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왕따를 방관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일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 일을 좋아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내가 부당한걸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처음엔 화가 났다.

왜 나의 상사는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기를 선택한 것인가.

왜 A는 오랜 기간 함께했던 상사의 마음 하나 잡지 못하는 것인가.

왜 두 사람은 나를 이런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것인가.

왜 나는 이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상황에서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왕따를 시키는, 당하는, 방관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모른 척하고, '방관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나는 상사에게 A와 함께 갈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을 찾는 건 어떻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사는 그러지 않았고, 매일 A를 비난하며 화만 냈다. 나는 상사에게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선택에 책임지라고 말해야 했을까? 나는 내가 잘리더라도, 상사에게 (왕따 시키는) 비겁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말해야 했을까?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나보다 직급이 높은 A에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 손을 잡으라고. 왜 상사의 마음 하나 붙잡지 못하냐고. 제발 트러블 좀 일으키지 말라고.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야 했을까? 아니면 상사와 상관없이 A의 편이 돼줘야 했을까?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왕따'로 만들면 안 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따'는 늘 존재한다. 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놓이고 보니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는 기대 이상의 흥행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지 않았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걸까? 언제든지 똑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은 또 올 거다. 그때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훌륭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좋은 사람은 못되더라도...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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