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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Jan 17. 2020

너만큼 나도 힘들었어

:  영화 현장에 대한 이슈.


"무슨 일 있어?"

후배가 우리 집 근처에서 촬영하는 친구가 있어 응원차 왔다가 연락을 했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한숨부터 푹-쉰다.

 

후배는 오늘 새벽, 친구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유인 즉, 후배의 친구는 학교에서 졸업 영화를 찍고 있는데, 얼마 전 영화 <호흡>의 주연배우의 발언으로 학교로부터 이런저런 '압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후배의 친구 역시 무리한 스케줄을 감행하고 있었기에, 현장에 나가면 스태프나 배우들 얼굴 보기 미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화를 완성 수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 현장에 대한 이슈'까지 불거지니 현장에 나가기가 무섭다는 것이다.


후배는 그런 친구를 어떻게 응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개봉까지 한 영화의 주연배우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싶어 기사를 찾아봤다.

"참을 수가 없었다.
욕심만 많고 능력은 없지만 알량한 자존심만 있는 아마추어와의 작업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짓인지,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뼈저리게 느꼈고 마지막 촬영 날엔 어떠한 보람도 추억도 남아있지 않았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아이고오오...

들게 촬영을 끝내고, 영화가 개봉하고, 그 영화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홍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연배우 영화 현장에 대한 폭로 글을 SNS에 올리기까지 분명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파장과 영화와 본인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피해를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꼭 그래야만 했나?


학교는 사건이 불거지니까 지금 촬영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말 나오지 않게, 알아서들 좀 잘하란 말이야? 어?"

 

'압박'이라는 표현이 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주의'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그 학교를 졸업하고 상업영화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의 말로 대신한다.


후배는 버젓이 대학원까지 마지만, 영화의 꿈을 저버릴 수 없어 '영화를 배우기 위해' 다시 학교를 갔다.

그런데 교수님들은 후배가 쓴 시나리오를 평가하면서 '왜 이렇게 밖에 못써?'라고만 했단다.


학자금 대출까지 받으며, 굳이 학교에 다시 간 이후는 '왜 이렇게 밖에 못쓰냐?'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잘 쓰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내가 지금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


질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비싼 등록금을 내는 이유는 질타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후배의 친구와 같은 심정으로 촬영을 하고 있을 '학생' 감독들에게, '학생' 스태프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질타보다는 주어진 환경(=예산, 스케줄 등)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지 '방법(=대안)'을 알려줬더라면 더 좋지 않을까?


* 나 역시 영화일을 시작하고, 영화에 대해서 더 배우고 싶어서 '미디어영상학과'에 지원했었다. 그런데 현장에 비해 학교는 많이 뒤처져있었다. 영화 현장은 한 해 한 해 시스템이 바뀌고 있다. 그런데 학교는 몇 년 전 교과서와 현장을 떠난 지 오래된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학교도 많을 거다.) 

- 학교가 프로필에 적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작이 되어주면 좋겠다.  


"결과만 좋으면 좋은 영화인가.
이 영화의 주인 행세를 하는 그들은 명작, 걸작, 수상한, 묵직한 이런 표현 쓸 자격조차 없다.
애정을 가지고 참여한 작품에 너무 가혹한 상처들이 남았고, 내가 느낀 실체를 호소하고 싶고, 다른 배우들에게도 이 학교와의 작업의 문제점을 경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선택했고, 돈을 떠나 본질에 가까워지는 미니멀한 작업이 하고 싶었다. 초심자들에게 뭔가를 느끼고 오히려 열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지 않을까 큰 착각을 했다."


주연 배우가 SNS에서 말한 것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힘겹게 촬영을 마친 영화다.

그 영화가 드디어 개봉을 했다. 그런데 그 제작 과정이 100% 정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불합리했다고 느낀 현장에 대해 말하는 건 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한 선택이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라 상처뿐이었다고 해서 그 영화를 위해 최선을 다 한 사람들의 진심까지 외면당해야 했을까?


배우가 말한 것처럼 거기에 있는 감독 그리고 스태프들은 모두 초심자였다.

그리고 배우는 그들보다 많은 경험이 있었다. 물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더 많겠지만...

거기에 있는 스태프들도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있었을 것이다.  


"죄짓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니? 너만큼 나도 힘들었어" (영화 <호흡>에서 정주가 하는 말이다.)


질타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현장잘못됐다 하더라도 '방법'이 적절하지 못했다.





너만큼 나도 힘들었어


후배의 푸념을 듣고 돌아오는 길이 씁쓸했다. 사실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크기와 모양새만 다를 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단 초저예산 영화에서의 뿐만 아니라 예산이 더 많은 상업영화라고 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분명 어딘가 잘못됐다. 하지만 학교와 사회는, 그러니까 조직은 '억울하다'라고 소리치는 걸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물론 사건이 불거지고 사람들의 질타가 쏟아지면 잠깐 화르르~타오르는 척한다. 하지만 금세 다시 제자리걸음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딪히면서 바꿔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방법이 좀 더 유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영화가 잘 돼봤자 감독이, 제작자와 투자사가, 배우들만 좋은 거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도대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늪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참여했던 영화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고 해서

밤새워 준비하고 뛰어다녔던 영화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는 건 참담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함을 관철시키기 위해선 '질타'가 아니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대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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