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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Jan 11. 2020

토요일 오후 커피숍

: 보일러가 고장 났다.


어제 아침,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시가스 점검하는 아주머니였다. 두꺼운 옷을 잔뜩 껴입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들어오시면서 몸을 부르르~ 떠셨다. 아주머니는 보일러실로 들어가시면서 "밖이 더 따뜻하네요"라고 하시더니... 보일러가 2003년도 거라고 이 정도면 돌아가고 있는 게 신기하다고 빨리 집주인한테 이야기하라고 하시고는 부리나케 점검을 마치고, 집을 나가셨다.


사실 작년 겨울부터 뜨거운 물과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눈을 뜨면 씻어야 한다는 공포로 오소소 몸이 떨렸다. 처음에는 수도꼭지 물이 쫄쫄~ 흘러나오도록 틀면 따뜻한 물이라도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나마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결국 포트기에, 냄비에 물을 끓여 씻어야 했다. 그럼에도 보일러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겨울이 지나가길 그저 버티고 있었다.


'이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 참고 있을까' 큰 일은 오히려 척척 해결하는데 이상하게 이런 일은 해결할 엄두를 못 내고 계속 미루고 있게 된다. 우선, 수리가 아닌 보일러를 교체하게 될 경우 금액이 많이 나올 수도 있으니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보일러 a/s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주인은 파르르~ 떨며 "살면서 고장 난 건 알아서 고쳐야죠" 란다. 아니.. 보일러가 2003년도 거라고요.


집주인은 본인의 수첩을 뒤적거리며 2014년도에 바꾼 거라고 말했고, 나는 호수가 잘못 적힌 것 같다고 말했지만 집주인은 내 말은 듣지도, 믿지도 않았다. "언니가 잘 몰라서 그래. 아무튼 알아서 해요"

누군가와 싸워본지가 오래돼서 그런지 전투력을 잃은 나는 더 싸워봤자 의미가 없지 싶어 여기저기 검색을 해 보고, 전화로 문의 한 뒤 결국 수리 기사님을 불렀다. 다행히 수리 기사님은 3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


보일러를 본 수리기사님은.. 2003년이 아니고, 2001년 제품이라 부품이 단종돼서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셨다. 나는 집주인 아주머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수리 기사님께도 마구 우기실까 걱정돼서 집주인과 했던 대화를 설명하고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넘겨 드렸다. 수리기사님은 집주인에게 차분하게 내용을 설명하고는 전화를 끊더니만 자주 있는 일이라며 웃으셨다.


수리 기사님이 돌아가시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냉장고에 있는 치킨을 렌지에 돌리는데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누구세요?"라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 앞에 가만히 서있자 다시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집주인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집주인은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러라 했고, 집주인은 보일러실로 들어가더니 2001년이 적힌 표를 보고서야 "20년이면 오래 썼네.. 보일러 튼 거야?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참았어?"라고 말했다. 나는 새해부터 이런 일로 전화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추워서 씻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자 "진즉 말하지 그랬어?"라고 태도를 바꾸고는 참는 김에 조금 더 참으라고 말하곤 돌아갔다.


나는 드디어 이 반지하방을 벗어날 때가 왔나 보다- 생각하며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은 밤새 몇 번의 확인 전화를 더 하고, 오늘 아침 8시 30분부터 여차 저차 해서 당장 교체는 어렵지만 다음 주엔 꼭 바꿔 주겠다고 말했다. 몇 시간 못 자고 눈을 떴지만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아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거울 속의 부스스한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하루쯤 안 씻는다고... 티가 날까?' 거울 속에 나를 설득하고는 욕실을 빠져나왔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더욱 북적거리는 커피숍, 오늘따라 사람들은 유독 화사해 보인다. 그리고 창가에 햇살은 유독 나만 비추는 것 같다. 다른 날은 신경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왜 오늘은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분명 눈치 없이 흐르는 콧물과 감춰지지 않는 떡진 머리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본다.

뜨거운 물의 소중함과 함께 2020년 시작부터 혹독한 겨울을 겪고 있다.


+ 올 겨울 감기는 작년보다 더 독하다고 합니다. 감기 걸리지 않도록 모두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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