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시간 돼?"
"오늘이요ㅎㅎㅎ"
그렇게 불쑥 강남으로 팀장님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팀장님이 어딘지 모르게 창백해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핼쑥해요"
"일은 무슨.. 잠을 못 자서 그래"
"누가요? 설마 팀장님이요?
"......... 나 요즘 매일 실수하는 꿈을 꾸거든."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팀장님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아무리 큰 사건이 벌어져도 누우면 1분 안에 잠이 드는 사람이다.
<< 팀장님이 투자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퇴근 10분 전에 대표가 툭툭툭- 일을 던져주는 카톡을 보내왔다. 당연히 10분 내에는 끝낼 수 없는 일이었기에 야근을 확정하고, 만나기로 했던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면서 친구에게 대표 욕을 미친듯이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카톡방에 친구의 이름이 아니라 '대표'의 이름이 있었다.
팀장님은 0.1초의 고민도 없이 벌떡 일어나 대표의 방을 향해 부리나케 달렸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통화를 하느라 카톡을 확인하지 못했던 대표는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 물었고, 팀장님의 솔직한 고백에 대표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그락불그락 변했다.
그날 욕을 잔뜩 먹은 대표는 잠을 제대로 못 잤겠지만, 대형 사고를 친 팀장님은 숙면을 했다. >>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끙끙 앓는 일도 팀장님은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갑을 놓고 오는 사소한 실수부터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지각을 한다거나 메일을 잘못 보내는 등의 실수를 하는 꿈을 매일 꾼다는 것이다.
나... 왜 이럴까?
이제 '승승장구'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지금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팀장님과 한참을 이야기 한 뒤에야 '불안의 이유'를 찾아냈다.
팀장님은 <영화 제작파트>에서 일하다 어느 날 갑자기 <투자사>로 가더니만 지금은 <영화 제작사>의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결국 모두 '영화'와 관련된 일이지만 여러 파트와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다. 그리고 재작년까지 준비 중인 영화가 투자가 안 되고, 예산이 부족해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그 영화가 '대박'이 났다.
그리고 작년, '대박' 난 영화 덕분에 회사는 드라마와 영화를 함께 제작하는 큰 회사와 인수합병을 했다. 그렇게 작은 회사가 큰 회사가 되고 보니 연말에 실적 분석을 하고, 올해부터 실적 평가란 걸 받게 되었단다.
회사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불안의 시대'는 끝이 났지만, 좋아하는 영화뿐만 아니라 '실적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그만큼 그녀도 바빠졌다. 그런데 '기획'이라는 일이 도깨비 방망이로 뚝딱! 내리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와중에 새로운 직원들은 계속 뽑고, 옆에 사람들은 일을 촥촥~ 해 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팀장님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어디에 가서도 제 몫은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하던 일까지 잘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열심히 할수록 앞이 보이지 않고,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실수할까 봐... 뒤처질까 봐... '불안'해진 것이다.
나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들을 늘 척척해내던 그녀가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서로 보이는 데로만 보려고 했다.
"누가 부럽다고요? 제가요?"
나는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도 걱정하며 불안해 하는 사람이다.
일을 할 때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불안.
그래서 늘 불면증과 동거동락하며 산다. 그래서 나는 <고민을 고민하지 않았던> 그녀를 항상 부러워했었다.
내가 10년 차 정도가 됐을 무렵, <투자사>에서도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지 못해서 이력서조차 넣을 수 없었다.(왜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투자사에서는 현장 경험, 그러니까 경력직보다 현장을 잘 모르더라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더 중요한 듯했다.) 그래서 나는 <투자사>에서 일하는 그녀를 항상 부러워했었다.
나는 프리랜서다. 모든 '프리랜서'가 그러하듯 한 작품이 끝나고 나면
'언제 또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을 안고 산다. 그래서 나는 <영화 제작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그녀를 항상 부러워했었다.
나는 사실 '현장' 보다 '기획' 파트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은 <기획>을 배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기획>을 하는 그녀가 정말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는 그녀의 성격, 일, 직장 하물며 남편까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그녀로부터 "네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이상했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있잖아"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서로 보고싶은 데로만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팀장님의 '불안'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백수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팀장님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너무 잘하려는 마음 때문에 불안한 거 같아요."
나는 팀장님이 지금 '더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잠시 잊고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 사람인지.
때때로 '불안'이 나를 잠식하려고 할 때, '불안'에 휩쓸려 우울감에 빠지기보다는
지금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한지 '불안의 이유'를 찾아보고, 내 '불안'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누구도 '불안'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다.
"네가 누굴 걱정해. 숟가락 빨고 있는데..."
팀장님과 헤어지고, 답답한 마음에 친구들을 불렀다. 그리고 친구들과 팀장님과 나눴던 '불안'에 대한 이야기했다가 쿡-제대로 가슴에 화살이 박혔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식은땀이 나..."
"으응? 네가?"
사람 좋아하고, 술을 좋아해서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나기도 힘든 그야말로 핵인싸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친구는 '내가 어디 아픈가?' 싶어 병원에도 가봤으나 별 이상이 없었단다. 그래서 '내가 왜 이러지?' 생각하다 보니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그만큼 사람에게 치이는 일도 많아졌단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너무 좋다던 친구가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불안'해지기 시작해서 '불안'하다고 한다.
"나는 혼자인 게 불안해"
"으응? 넌 또 왜?"
돈 있고, 능력 있고, 심지어 남자 친구도 끊긴 적이 없지만 '결혼 따위 필요 없어'를 외치며, 같이 하는 여행보다 혼자 하는 여행을 더 즐기던 친구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친구의 입에서 '혼자인 게 불안'하다는 말이 나오자 우리 모두 놀랐다. 지금까지는 편한게 더 좋았는데 언젠까지 일을 할 수있을까? 생각하다보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야, 그럼 남편도 있고, 애도 있는 나는 얼마나 불안하겠냐!"
"(으응? 얘는 또 뭐라는 거야?) 남편도 있고, 애도 있으면 덜 불안한 거 아니야?"
착한 남편도 있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 둘이나 있는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원이 늘어나면 그만큼 '불안'도 배가 된다고 말했다. 듣고보니 두 친구의 '불안'이 묘하게 공감이 갔다. 그런데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소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그래도 니들은 나보다 낫다. 나는 내가 왜 불안한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더 불안해"
"말도 안돼!"
정말 말도 안되는 말이다. 이 친구야말로 뭘 해도 되는 애다. 그런데 녀석은 일이 너무 잘되니까 그게 더 '불안'하단다.
불쑥불쑥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저 사람은 웃고 있으니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저 사람은 돈이 많으니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저 사람은 능력이 좋으니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그런데 나만 '불안'한 게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불안'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모두들, 괜찮아요?
친구들과 헤어지고 지하철을 탔다. 늦은 시간이라 지하철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나는 왠지 모를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데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계속 훌쩍이더니만 콜록 콜록-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병원에 다녀왔는데 감기이니 안심하셔도 돼요"
하루아침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 모두 숨 막히는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매일 새로운 뉴스들을 살펴 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알 수 없는 미래가 가져다주는 불안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가져다주는 불안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가져다주는 불안
혼자이기 때문에 느끼는 불안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느끼는 불안
우리 모두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은 '불안'을 안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모두들,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