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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Feb 11. 2020

흔들리는 '소신' 속에서 '낭만'을 외치다.

: 전문용어로는 개멋부린다고 그러지.


집 근처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추가 이사 왔다. 드디어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동네 친구, 밥 친구가 생겼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과 백수는 밥 타임테이블이 맞질 않았다. 일하는 추는 밥 먹는 시간들이 대체적으로 일정하지만 백수인 나는 눈 뜨는 시간이 아침이고, 배가 고파야 밥을 먹는다. 그러다 보니 추가 이사온지 한 달이 넘도록 좀처럼 밥 타임테이블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나와- 밥 먹자!"

"나 좀 전에 빵 먹었어!"

"갈비 시켰어!"

".... 어디라고?"


그렇게 후다닥- 고양이 세수를 하고, 갈비님을 영접하러 나간 그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긴 시간 동안 옛날이야기, 했던 이야기들만 반복하다 보니 살짝 지루하다 생각할 무렵 추가 말했다.


"나 큰 회사에 스카우트 제안받았어!"

"와우, 진짜?"

"나 혼자 오래"

"응? 혼자? 그럼 KIM은?"




바야흐로 16년 전, 추는 다니던 회사에서 임금 착취를 당하다 결국 독립해서 지금의 회사를 차렸다. 일에 대한 자신감이 뿜뿜했던 시절이지만, 혼자 힘으로 회사를 운영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추는 건설현장 사업소에서 버젓한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KIM을 찾아갔다.


KIM은 추와 동갑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서 추보다는 현장 경험이 많은 선배였다. 그러나 KIM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현실을 선택하고, 영화 바닥을 떠났었다. 그리고 이제 숨통이 트일 즈음 회사를 차린 추를 다시 만났다. KIM은 여전히 남아있는 현실의 압박 속에서도 추의 손을 잡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추와 KIM에게는 지키고자 하는 '소신'이 있었다. 첫째는 자신들이 회사를 나와 지금의 회사를 만든 이유를 잊지 말자. 얼마를 벌든 직원들에게 정당한 월급을 주자. 그리고 둘째는 '타협'하지 말자. 일을 따내려면 '경쟁'을 해야 하고, 경쟁을 하려면 결국 '단가'를 낮춰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들은 '단가'를 낮추지 않기로 했다.


사실 동종 업계에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단가'를 낮추고, 결국 다른 방법으로 '단가' 이상의 금액을 빼먹고 있었다. 하지만 추와 KIM에게 '단가'는 그들을 지키는 자부심이기도 했지만, '눈가림'으로 속이며 일하고 싶지 않은 그들의 '소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구구절절 그들의 '소신'을 이야기하며 영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추와 KIM을 처음 미팅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그저 아마추어로 혹은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렇다. 추는 임금 착취를 당하기 싫어 회사를 차리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KIM까지 데려 왔지만...

그놈의 '소신' 때문에 그들은 결국 숟가락만 빨아야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일이 없자 추와 KIM은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서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밥값이 없어서 라면 하나를 나눠 먹으며 버텼다. 그리고 그렇게 '버티면서 일을 하다 보니' 성실하게 일하는 그들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렇게 16년이 지난 지금 추와 KIM은 쌓인 빚을 다 갚고, 각자의 드림카도 뽑고, 직원들도 늘어났다. 심지어 아직까지 그 '소신'을 지키고 있음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큰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KIM을 버린다고?"


추는 나를 한번 보더니만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나는 발을 동동 굴렸다.


"거절해!"

"돈을 많이 준대!"

"먹고살기 힘들어?"

"아니"

"그러니까 거절해!"

"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준대!"

".... 얼마나? 아니... 그래서 돈 때문에 KIM을 버린다고? KIM이 없었으면 지금 같은 제안도 없었어.

그 회사 속셈 뻔하잖아. 결국 이전 회사에서처럼 이용만 당할 거야!"

"ㅋㅋㅋㅋㅋㅋㅋ"

"지금 웃음이 나와?"

"왜 네가 난리야? 듣자마자 거절했어!"

"뭐야? 지금 나 놀린 거야?"

"그런데 거절했다고 해서 생각이 안나는 건 아니더라!"


나는 대답 대신 추의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만약 나에게 지금까지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제안이 온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좀 더 솔직하게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기 때문에 '돈보다는 의리'라고 멋지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녔을까?




흔들리는 '소신' 속에서


사실 나도 영화일을 하면서 나름의 '소신'이 있다.

영화 제작파트는 '라인업과 섭외'를 진행하면서 '돈을 관리'하는 파트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유혹'을 받는 일이 많다. 예전에는 비일비재했다면 요즘에는 알게 모르게 모두가 하고 있다.

 

표준 근로가 도입되고, 월급이 높아지면서 그나마 '살만하다'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유혹'이란 게 뿌리치기 힘드니 '유혹'인 것이고, 한번 발을 디디면 그다음은 더 쉬운 게 '유혹'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한번 맛을 보면 헤어 나오기 힘든 게 '돈의 유혹'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그 무섭다는 '돈의 유혹'마저 뿌리쳐왔다. 누군가는 내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고도 하고, 야망이 없다고도 하고, 꽉 막혀 답답한 사람이라고도 말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자신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득문득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막내로 들어왔던 친구가 나보다 먼저 입봉 했을 때, 아끼던 후배에게 좋은 선배란 '성공'한 선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소신'을 지키던 선배들이 하나둘 영화일을 그만뒀을 때... '소신'을 지키며 사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유혹'들과 마주하게 하게 됐을 때 이전보다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나보다 잘난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내가 뭐라고 꼿꼿하게 버티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아직은 '순간의 유혹' 때문에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을 지켜 온 그 시간까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 더 다.


그런데 오 '너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이라는 말이 유독 가슴에 남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의 유혹들이었기 때문에 나의 '소신'을 지킬 수 있었던 걸까? 그렇게 나의 '소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낭만'을 외치다.

 

[자료출처: SBS 낭만닥터 김사부 2]


[SBS 낭만 닥터 김사부 2]는 모두가 돈을 쫓는 무한 경쟁 시대에서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는 괴짜 의사 김사부(한석규)와 돌담 병원 사람들의 이야기다.


[4화에서] 빚에 쫓기는 우진(안효섭)에게 김사부는 천만 원을 빌려주며 말한다.

"내 돈으로 빌려준 거야. 매달 백만원씩 나한테 갚어! 너 나한테 10달간 꼼짝없이 묶여있어야겠다, 괜찮겠냐?"

"훗"

"왜? 비웃냐?"

"좀.. 오글거려서요"

"이건 전문용어로는 개멋부린다고 그러지, 다른 말로는 '낭만'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쉽게 흔들리면서도 내가 놈의 '소신'을 지키고 싶은 이유를 드라마에서 다. 

현실에서의 나는 김사부가 아니라 우진에 가깝다. 그래서 '낭만'은 밥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니까 내가 지키고자 하는'소신'은 '낭만'이라기보다 개멋부린다는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른 말로 '낭만'이라고 외치고 싶다.


낭만: 현실에 메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태하는 태도나 심리.




'낭만'이 필요한 이유

[자료출처: SBS 낭만닥터 김사부 2]

[9화에서] 수간호사와 병원 원장의 대화.
원       장: 되지도 않는 감상주의로 날 가르치려고 들어요?

수간호사: 생사가 가진 골드타임 안에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오는 곳이 여기 돌담 병원이에요. 그런데 돈이 안돼서 적자 때문에 그 사람들을 외면하라고요? 그럴 바에 뭐하러 시스템이고 나발이 고를 개선합니까? 피곤하게.

깨끗하게 문 닫으세요. 의사가! 그리고 병원이!! 환자보다 이윤추구가 먼저라면 볼장 다 본거 아닙니까? 


- 이 상황을 지켜보던 마취과 남도일과 심혜진의 대화.

심혜진: 와우, 이건 뭐 위아래도 없고, 위계질서도 엉망이고! 원장까지 세워놓고 돌려 깎기를 하다니...

남도일: 원래 우리 병원이 좀 그래요. 위아래도 없고, 위계도 없고! 대신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죠.

심혜진: 게다가 대책 없는 '낭만이즘'까지.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들?

남도일: 세상이 다 돈돈 그러면서 미쳐 날뛰고 있는데.. 존엄이고, 인격이고, 돈만 된다고 하면 다 팔아먹는 세상에서 그래도 어느 한 곳 안 그런 곳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대책 없는 '낭만즘'일지라도

추는 먹고살만하지만 아직 그가 원하는 목표까지 가기 위해서는 갈길이 많이 남았다. 그리고 그 회사의 제안은 분명 그 목표까지 보다 빨리, 쉽게 가기 위한 지름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제안거절한 추의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대책 없는 '낭만이즘'일지도 모른다.


나? 나 역시 눈 질끈 감으면 백수도 끝, 어딘지 모를 목표까지 보다 빨리, 쉽게 갈 수 있는 제안이 있었지만 결국 거절했다. 분명 누가 봐도 좋은 제안이었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하루 일이 없을까 봐 걱정, 먹고 살 걱정, 돈 걱정이다. 그러니까 내 '소신' 역시 대책 없는 '낭만이즘'일지도 모른다. 


결국 잘 나가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 현실에서 어쩌려고 그러지 들? 하고 혀를 찰 수도 있을 거다.



그래도 어느 한 사람, 안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가방 사줘!! 다른 업체들은 뭐도 주고 뭐도 준다더라"


헤어지는 길에 추에게 말했다.(그는 술 마실 때는 친구지만, 일 할 때는 한 업체의 대표다.)


"그럼 그런 업체랑 일하지. 넌 왜 나랑 일하냐?"

"비싸긴 한데 비싼 만큼 일은 하니까? 변하지 마, 변하면 같이 일 안 할 거야!"


드라마를 볼 때만큼 다소 오글거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모두 다 돈돈돈! 거리면서 미쳐 날뛰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처럼 보일지라도 그래도 어느 한 사람이라도 안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고 뜯기 바쁜 이 경쟁의 바닥에서 계속 '소신'을 지키면서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베짱이만큼 개미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놈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맞는 건지 아직도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잘 살았다'에 정답은 없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렇게 고집을 피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까 봐 겁이 난다. 

그래서 추에게 변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변하지 마'라는 말은 나에게 하는 '다짐'이도 하다.

흔들리는 '소신'이지만, 이것도 '낭만'이라고 외치고, '낭만'이 필요하다가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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