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이렇게까지 싸울 일인 건가.
: 입장 차이.
오늘 아침 9시 30분, 집주인 아저씨와 보일러 설치 기사님이 오셨다. 집주인 아저씨는 설치 기사님께 이러저러한 주의사항을 말씀하셨고, 설치 기사님은 쿵쾅쿵쾅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는 한쪽 구석에 멀찍이 떨어져 음료수라도 사다 놔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주인 아저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같은 린나이 보일러임에도 기계가 다르니 연통 사이즈가 달라서 설치 기사님이 연통 주변의 타일을 망치로 부수려고 했던 거다. 집주인 아저씨는 어쩔 수 없이 부숴야 한다면 망치가 아니라 드릴로 '예쁘게' 잘라 달라고 했고, 설치 기사님은 '보이지도 않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전문가인 본인한테 맡기라고 했다.
집주인 아저씨는 망치질은 '타일이 망가지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며 작업을 못하게 했고, 설치 기사님은 '다른 곳도 다 이렇게 하니까 유난 떨지 말라'며 팽팽히 맞섰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집주인 아저씨는 설치 기사님을 융통성 없다 말하고, 설치 기사님은 집주인 아저씨한테 고집불통이라고 씩씩 거렸다.
아, 이게 이렇게까지 싸울 일인 건가
나는 집주인 아저씨와 설치 기사님, 두 사람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됐지만 어느 누구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결국 집주인 아저씨가 설치 기사님께 일을 맡기지 않겠다며 보일러를 회수해서 돌아가라고 했고, 설치 기사님은 다 뜯었으니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끝나지 않는 싸움이 계속되자 집주인 아저씨는 주거침입으로 설치 기사님을 지구대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상황이 너무 커지자 집주인 아주머니와 보일러 사장님이 중재에 나섰다. 한참의 대화 끝에 집주인 아저씨가 인근 카센터에서 드릴을 빌려와 직접 타일을 '예쁘게' 자르고서야 보일러 설치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바람에 1시간이면 끝날 공사가 3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두 사람이 싸우는 바람에 설치 기사님은 다음 타임 작업에 가지 못했고, 점심도 먹지 못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바람에 집주인 아저씨는 직접 드릴 작업을 하느라 손을 다치고, 일을 나가지 못했다.
두 고집쟁이들이 만나니 별일 아닌 일이 큰일이 되고, 두 사람 모두 손해 아닌 손해만 봤다.
마포 친구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마포 친구는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과 2살이 되는 딸아이가 있다. 친구는 퇴근하면 부리나케 둘째를 어린이 집에서 픽업해야 하기 때문에 마포 친구와 밖에서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 회식이라도 잡혀 귀가가 늦어지는 날, 친구네 집에서 잠깐씩 만나곤 했었다. 늘 그렇게 정신없이 만나고 헤어졌던 게 미안했다며 친구에게 '밖에서 만나자'라고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친구와 하는 '외식'이라 맛있는 걸 먹고, 기분도 낼 겸 알록달록 예쁜 커피숍을 찾았다. 그렇게 밀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유모차를 끌고,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엄마와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들어오면서부터 소란스럽더니 역시나 10분도 지나지 않아 한 아이는 뛰고, 한 아이는 울고 순식간에 커피숍 안 사람들이 그쪽만 쳐다보게 됐다.
어찌나 정신없는지 우리도 계속 그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아이 엄마들에게 한마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아이 엄마들과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무언가에 열중하던 언니가 인상을 험하게 구기는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커피숍은 수다 떨러 오는 거잖아. 그런데 저렇게 노트북 펴고, 공부하거나 일하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
"응?"
아.........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거 같았다. 주로 커피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는 아이 엄마들을 보고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커피숍은 '누구나' 편하게 먹고, 마시고, 떠들고, 쉬는 곳이다. 그런데 저 아이 엄마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지 않나?
내 말에 친구도 지금 저 아이 엄마들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커피라도 마시려고 커피숍에 가면, 공부하거나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이가 목소리를 조금만 크게 내도 신경이 쓰인다는 거다. 그러다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허겁지겁 정신없이 커피숍을 뛰쳐나온다고.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뛰쳐나온 자신에게 그리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화가 난단다.
노트북을 보고, 책을 읽는 게 누군가한테 피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아이 엄마들에게는 되려 나 같은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아이 엄마들을 봤다. 아이 엄마들은 아이들보다는 밀린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그동안 얼마나 쌓였으면 저럴까?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보니 아이 엄마들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아침부터 집주인 아저씨와 보일러 설치 기사님의 싸움으로 혼이 다 빠져서 그런지 정신이 너무 산만했다. 커피숍에 왔지만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 책을 들었다. 역시나 그마저도 집중이 되지 않아 잔뜩 예민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차를 끌고 들어오는 젊은 엄마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젊은 엄마가 커피를 주문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우자 엄마가 사라진걸 귀신같이 눈치챈 아이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우는 아이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재빨리 가지고 있던 펜을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놀란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아이와 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장난을 치고 있으니 자리로 돌아온 젊은 엄마가 빵끗- 웃으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 엄마와 쏙 빼닮은 아이도 빵끗~웃는다. 두 사람을 보니 나도 모르게 빵끗- 웃음이 났다.
나는 마포 친구가 아니었다면 오늘처럼 예민한 날, 우는 아이를 보고 잔뜩 인상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저 젊은 엄마는 커피 한잔을 제대로 못 마시고 눈치를 보다 나갔을지도 모른다. 젊은 엄마와 아이의 빵끗- 웃는 미소로 잔뜩 찌푸렸던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서로의 입장을 조금만 생각하면 그렇게 큰 일도 아닌 것을.
집주인 아저씨와 설치 기사님의 전쟁은 서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조금씩만 존중해줬다면' 일어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서로의 입장만 고집하다 보니 다치고, 일을 나가지 못하고, 서로에게 손해와 상처만 남겼다.
커피숍에서 우는 아이는 민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커피숍에서의 나도 누군가에게는 민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조심스러워졌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오히려 우는 아이에게 위로를 받았다.
인상 쓸 일이 있더라도,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있더라도... 한 발자국만 물러서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 보자.
오늘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지만, 이 낯선 사람도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친구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친구라고 생각하면 그리 화내고 싸울 일도 아니지 않은가. 굳이 인상 찌푸리며 오늘 하루 서로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