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역사적인 수상을 했다. 수상 당일, 내가 그 작품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그와 작품을 함께 했던 것도 아니고, 그러니 당연히 아는 사이도 아님에도 동료들, 친구들 심지어 아빠한테까지 전화를 받았다.
그중 연출을 꿈꾸며,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친구는 갑자기 봉준호 감독이 롤모델이라고까지 말했다.
"왜? 상을 받아서?"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나역시 봉준호감독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다 봤고, 한때는 그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을 만큼 그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번 수상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대단한 업적이고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술 먹을 이유가 생겼다며 나오라는 연락을 받을 때마다 왜 걱정이 먼저 드는 걸까?그래서 오늘은 봉준호 감독은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겪은 감독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첫 번째 감독은 자기 관리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드라마에서 나름 히트를 치고, 영화에 뛰어든 이 감독은 촬영 준비가 끝나가도록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배우들은 준비 중이고, 제작&연출팀들은 사라진 감독을 찾기 위해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감독은 머쓱한 표정으로 현장에 나타났다. 전날 술에 취해 숙소 근처 길바닥에서 잠을 잤단다.어찌 됐든 감독이 왔으니 촬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번 감독 찾아 삼만리를 하다 보니 촬영이 끝났다. 첫 작품이기 때문에 모든 게 새로웠고, 첫 감독이었기 때문에 그 감독이 잊히지 않는다.(이 영화는 잘 안됐지만, 그는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 히트 감독이 되었다.)
두 번째 감독은 현장에서 많은걸 결정하고, 바꾸는 사람이었다.
촬영이 한창인 어느 날, 감독은 시나리오에 없던 장면(=노출)을 여배우에게 요청했다. 여배우는 사전에 협의가 없던 '노출'인지라 감독에게 자신을 설득해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감독은 여배우에게 그 장면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하기보다 "그럼 3초만? 응?"이라고 막무가내로 사정했다. 당연히 여배우는 거절했다.이런 일들은 영화를 찍는 내내 계속됐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그 감독을 아직도 3초만 감독으로 기억하고 있다.(이후에도 현장감이 좋다는 감독과 작업한 적이 있다. 두 번의 경험으로 확실히 알았다. 현장감이 좋다는 말은 준비가 부족한 걸 포장한 것 일뿐이다.)
세 번째 감독은 욕심만 많은 사람이었다.
시나리오가 좋았지만 상업적이지 않아 투자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감독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찍느냐 보다생각했던 대로찍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평불만뿐이었다. 초저예산이다 보니 '의리와 열정'으로 모인 스태프들은밤낮없이 촬영을 계속했지만 감독의 욕심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 감독이 직접 데리고 온 스태프들마저 심하다 느껴질 정도로 감독을 비난하는 현장이었지만 그 영화는 감독도, 배우들도 많은 상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현장은 늘 소문이 안 좋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누군가의 희생으로 영화를 찍고 있다.
네 번째 감독은 여우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영화를 하면서 예산 브리핑을 해달라고 요청한 처음이자 마지막 감독이다. 힘 줄 곳과 뺄 곳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감독이라고 말한 그는 하나를 내어주고, 둘셋을 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모니터 테이블에서는 온갖 인상을 쓰면서도 '컷'을 외치고, 배우에게 달려가는 그의 표정은 언제나 해맑았다. 배우들은 그가 원하면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웃으면서' 다시 찍었다. 다만, 스태프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그건 네 작품에서나 해!"라고 말해서 '함께'일하는 스태프들의 의욕을 떨어뜨리곤 했다.
영화가 개봉하자해보지 않았던 장르라 시행착오가 많았다며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하던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전 작품들을 조금씩 뛰어넘는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 감독과 함께 작품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음 작품은 기대하고 있다.
다섯 번째 감독은똑똑했지만, 홀로 고군분투하는사람이었다.
이 감독은 상업 영화 현장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렸지만 어떤 질문을 해도 척척 머릿속의 그림을 말해 줌으로써 배우에게 신뢰를 얻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그런 똑똑함은 약이자 독이 되었다.(단편 영화를 찍으면서 혼자서 모든 작업을 했기 때문에 상업 영화에서도 똑같은 작업 방식을 고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프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감독이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감독이 생각하는 그림을 스태프들과 공유해야만 촬영 준비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고 설득해야 했고, 이 일을 시작으로 이런 설득의 과정이 영화를 완성하는 내내 이어졌다. 당연히 촬영에 들어가면서 그의 생각과 다른 부분들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그는 정작 감독으로서 본인이 신경 써야 할 일까지 신경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안타깝게도 혼자서만 너무 모든 걸 열심히 하려는 사람이었다.(나는 지금까지 이 감독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가 늘잘되길 응원한다.)
여섯 번째 감독은 시나리오를 쥐락펴락 하는 사람이었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하는 변수들이 있다. 이 영화는 준비기간이 짧았고, 당시 비슷한 영화가 제작되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겹치는 소재들을 걸러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감독은 늘 밤늦게까지 시나리오를 수정했고, 당시 어쩌다 보니 감독의 야근 메이트였던 나는 감독과 시나리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이 많았다.
2시간 이상 잠을 못 자는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에피소드 하나를 통째로 덜어내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시나리오를 뽑아내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촬영에 들어가자 일주일에 한 번씩 제작, 연출팀들을 번갈아 불러다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을 퍼부었다. 분명 욕을 듣고 있는데 워낙 저급하고 생소한 욕이라 욕이 신선하게 느껴졌다.그리고 (사람들은 그것도 사랑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나이 어린 여자 스태프에게 빠지면서 그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졌다. 나는 아직도 그와 함께한 시나리오 회의가 가장 즐거웠다. 그래서 그가 '연출'을 하기보다 '작가'로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꿈은 안타깝게도 '감독'이다.
일곱 번째 감독은 그야말로 무례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 감독과 두 작품을 함께 했다. 그리고 세 번째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거절했다. 이유인즉, 첫 작품 때 오랜 시간 준비만 하던 그는 주변에서 "감독은 이래야 한다"라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 와서 다소 격한 표현으로 현장에서 '감독 짓거리'를 했다. 현장에서그는'감독은 왕이다'라는 신념으로 스태프들과 모니터를 보는 것도 싫어했고, 심지어 밥을 같이 먹지도 않았다. 그는 스태프들을 함부로 대했고, 무례했다. 그래서 두 번째 작품도 거절하려고 했는데,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런 거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당시 피디님의 말을 믿고 두 번째 작품을 했으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이 감독 덕분에 새삼 배웠다.
그러나 이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그는 이제 작품만 말하면 알만한 유명한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작품을 안 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유명하지 않았을 때도 무례한 그는 이제 '힘'까지 갖췄고, 유아독존으로 현장에서 매일 놀라운 에피소드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감독은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는 캐스팅을 진행하면서 늘 자신감이 넘쳤다."배우랑 만나게만 해주면 나한테 넘어오게 할 자신 있어요!"
그랬다.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전작을 재밌게 봤던 터라 기대가 높은 감독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약속이 있다며 사무실에 나오지 않거나 억지로 나와도 늘 졸고 있거나 맛집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체 스태프와 회의를 하던 중에 감독의 의견을 물어보면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하며 회의 도중에 나가 버리고, 문제가 생기면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가요?'라고 탓하기 일쑤였다. 알고 보니 그는 말로 사람을 때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연기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현장에서도 배우들에게 직접 연기를 선보이기도 하는 그는 TV에서낯가림이 심한 사람으로 나온다.잘되면 내 탓, 안되면 남 탓만 하고,매일 술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영화인들은 그래도 된다'는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가 수줍은 모습으로 TV에 나오는 걸 볼 때면 리모컨을 던지고 싶어 진다.그럼에도 그의 작품 역시 대박이 났다. 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 나쁜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홉 번째 감독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감독이 되려면 연출팀으로 오랜 시간 현장에서 경험을 쌓거나 몇 년간 피땀 흘려가며 시나리오를 쓰다가 제작사에 들어가 준비를 하게 돼도 결국 엎어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만큼 '감독'이 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감독은 이 모든 과정이 없이 학교 졸업 작품이 상을 받자 이곳저곳에서 연락을 받았고, 비교적 순탄하게 상업 영화감독이 되었다.그런데 영화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감독의 무지는 '감독 바라기'인 스태프마저 등을 돌리고, 베테랑 배우들마저 대화를 피하게 만들었다.
나는10년을 넘도록 영화일을 하면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감독'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감독'의 무게와 책임감 등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독은 그런 생각을 처음으로 깨부숴 준 감독이다.
'감독'으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와 책임감마저도 누군가가 대신해준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어찌 됐든 감독이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감독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영화는 흥행했다. 그러고 나니 이 감독은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에서까지 콜을 받고 있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또 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는 정말이지 운이 좋은 사람이다.
>> 물론 아직 내가 만난 감독들보다 만나지 못한 그리고 만나야 할 감독들이 더 많다는 걸 안다. 그리고 어떤 감독이 좋은 감독인지 말하기도 어렵다. 착하기만 하다고 해서 좋은 감독은 아니고, 그렇다고 능력만 뛰어나다고 해서 좋은 감독도 아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감독이 어떤 감독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다만, 스스로 어떤 감독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좋은 '감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영화가 개봉하면가능하면 다 보려고 노력한다. 내 취향과는 별개로 '개봉'까지 간 영화들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요즈음 영화를 보고 나면 이상하게 지치고, 피곤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영화들이 재미없는 이유에 대해서 무조건 감독 탓이라고만 할 수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일전에 투자사 본부장님을 만난 적이 있다. 시나리오 두 편을 읽었는데 두 편 모두 완성도가 너무 떨어졌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 물어봤다.
"이 영화를 왜 투자하세요?"
"손해 볼 것 같지 않으니까!"
그 시나리오는 고쳐도 고쳐도 좋아지지 않아서 그냥 들어가는 거라고 말했다. 이미 투자한 돈이 있으니까.
그리고 당시 감독에게 몇 가지 위험요소가 있다고 말했더니 '알고 있지만 상관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투자사 탓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럽다 어렵다 말하지만 영화 제작은 점점 더 많이 들어가고 있다. 여기저기 투자받은 돈들이 넘쳐나다 보니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기보다 일단 뽑아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영화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 일이 많아지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계속 이렇게 영화가 만들어져도 괜찮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이런 와중에 좋은 영화도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섭다.
굳이 오늘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영화가 잘 됐을 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 투자사도, 제작사도, 스태프도 아닌 '감독'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필요하지만, 그 중심에서 그만큼의 무게와 책임이 큰 사람 역시 '감독'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수상으로 영화인들은 한동안 더 축제 분위기일 거다. 그런데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 고드름을 예쁘다고 쳐다보고 있는 기분이다. 역사적인 수상을 축하하는 것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연출을 꿈꾸는 많은 감독 지망생들이, 지금 연출을 준비하는 감독들이, 지금 촬영을 하고 있는 감독들이 그리고 영화를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단 한 번의 수상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 단 한 사람만의 경험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 '좋은 영향'만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