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쏟아지는 장떼 비처럼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다. 백수인지라 다니는 곳이 고작 커피숍이었던 나는 그마저도 못 다니고 방콕을 하기 시작했고, 직장을 다니는 남동생은 외근이 없어졌다. 장사를 하시는 아빠는 300kg를 팔던 물고기를 3kg도 겨우 파는 지경이라고 한다. 결국 뉴스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우리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여파는 영화 쪽에도 미치고 있단다. 단지 개봉을 미루는 것뿐만 아니라 투자 단계와 해외 촬영 예정인 영화들은 모두 홀딩 상태이며, 촬영을 준비 중인 영화들 역시 장소 섭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당장 이번 달 말부터 촬영을 해야 하는데 촬영 허가를 받은 장소들에서 거절하는 연락이 계속 온다고.사실 지금처럼 많은 인원들이 모이는 장소가 위험한 상황에서, 많은 스태프들이 한꺼번에 내 집에, 내 가게에 온다면 당연히 부담이 클 거라 촬영을 거절하는 입장 또한 백번 이해가 가기 때문에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 상황이란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묻는데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뭐라 해줄 이야기가 없었다. 사실 촬영 장소를 섭외하다 보면 계약서에 도장까지 다 찍고도 전날 아무런 이유 없이 거절하는 경우도 있고, 장소 제공자에게 부득이한 사정이 생기기도 하고, 촬영 장소 근처에 예정에도 없던 공사를 하고 있기도 하는 등 별의별 일들이 다 있지만 그럴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설득하거나 아쉽지만 스케줄을 바꾸고, 다른 장소를 찾는다. 그런데 코로나가 계속 확산되는 지금 장소를 바꾼다고 해도 같은 문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섭외, 어디까지 해 봤니? (feat. 영화인들의 허세)
# 누가 가도 촬영은 절대 안 되는 장소라고?
이건 예전 영화 촬영 시 제작 퍼스트 이야기이다.
1) 주인공이 사는 일산 오피스텔
방송국 PD들도 이 오피스텔에 많이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촬영을 허락한 적이 없다던 오피스텔을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각했던 장소라며 비슷한, 다른 장소는 감독이 싫다고 말한다.
2) 비 오는 도로에서 주인공의 차가 멈추고, 시내 거리로 비를 맞고 뛰어 들어가는 남녀 주인공.
도로, 시내, 비 - 어려운 조건이 1개도 아니고, 3개다. 그럼 보통은 차량통행도, 사람도 적은 곳을 가면 좀 더 수월하겠지만 늘 그렇듯 그런 장소는 감독이 OK 하질 않는다.
일단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미션을 받은 제작 퍼스트는 그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 간다. 까인다.
다음은 헌팅을 총괄하는 제작부장이 간다. 까인다.
다음은 한때 헌팅으로 어깨에 힘꽤나 줬다는 제작실장이 간다. 까인다.
다음은 가장 힘 있다는 피디가 직접 움직인다. 역시나 까인다.
돈이 없어서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가장 힘든 건 돈으로도 안 되는 장소다. 그야말로 누가 가도 안 되는 장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두 장소들을 제작 퍼스트가 '허가'를 받아왔다.
출근하는 길에 혹은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 장소의 담당자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처음엔 '왜 또 왔어?' 하고 냉담했던 장소 담당자도 시간이 지나면 '안 힘들어?' 하고 걱정을 해 주시고,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냐?' 등 촬영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하게 됐고, 결국 '허락'까지 받게 된 거다.
직위로도, 돈으로도 안 되던 장소의 촬영 허락을 받는 제작 퍼스트는 그 영화의 '영웅'이 되었다.
# 달리는 기차의 속도를 줄였다고?
이건 내가 처음 제작부장을 했을 때의 이야기다.
- 달리는 기차에서 남자 주인공과 나쁜 놈이 죽일 듯이 싸우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촬영 도중에 감독과 촬영기사가 기차가 너무 '빨라서'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 거기 있는 스태프들이 모두 장소 담당자인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피디가 말한다. "안돼?"
기차가 빠른 건 당연한 건데.. 그 당연한 걸로 이유로 찍을 수가 없다고 말하면 "어쩌라고요?"라고 되물어야겠지만,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말한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달려간다. 맨 앞칸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면,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기장님이 담당자인 나를 쳐다본다.
그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기차 속도를 조금만 줄여달라고 부탁해본다.
그럼 당연히 다음 기차와의 간격 유지 때문에라도 속도를 줄이는 건 위험하다고 거절한다.
그렇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나는 나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라고 물으시고는 기차의 속도를 줄여주신다.
그렇게 달리는 기차의 속도를 줄이는 데 성공하고, 촬영지에 돌아가니- "다 못 찍었으니 한번 더!"
기차가 바뀌면 기장님도 바뀐다. 그때 나는 그렇게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3번이나 더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을, 다시 하라고 해도 절대 못할 일이 가능했던 건... 뭐라도 해보겠다고 애쓰는 나를 향한 기장님들의 '측은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불타버린 나무, 어거 어쩔 거야?
이 이야기는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오빠의 경험담이다. 사극 촬영 중, 섭외 해 놓은 시골집에서 사전 세팅을 하던 소품 실장이 추운 날씨 때문에 드럼통에 불을 지폈던 게 화근이 되었다. 작은 불똥이 바람에 날리다가 마당에 있던 나무에 옮겨 붙은 거다. 추운 겨울이라 나무는 순식간에 타 버렸고, 주인아저씨는 몹시 화가 났다.
그 나무는 주인아저씨의 아버지가 심으신 나무였고, 다 타버린 나무는 다시 되살릴 수도 없었다.
촬영을 하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 장소 담당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인아저씨께 사정했지만, 당연히 촬영 거부! 촬영팀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것조차 싫어하셨다.
당시 제작실장이던 오빠는 그 이야기를 듣고 주인아저씨를 만났다. 촬영을 허락받기 위해서가 아닌 주인아저씨에게 진심을 담은 사과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오빠 역시 아버님이 돌아가신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누구보다 이해가 갔단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인아저씨의 화도 조금 누그러졌고, 다음날 촬영을 해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장소 담당자는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게 가능한 거냐?' 물었지만 다른 이유는 없다. 절대 용서해주실 것 같지 않은 주인아저씨의 마음도, 그런 주인아저씨의 마음을 헤아리려던 오빠의 마음에 움직이셨던 거다.
영화 제작파트에서 일하다 보면 장소 헌팅과 섭외는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치다 보면 저마다 믿기 힘든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생긴다. 그렇게 섭외 경험을 쌓고, 능력을 키워도 절대 안 되는 장소들이 생긴다. 그런데 그 장소를 영화일의 경력이 없는 친구가 덥썩- 해결하기도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 믿기 힘든 에피소드들이 가능한 이유는 그 중심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딨어?'라고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돈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런데 그 돈으로도 안 되는 일도 '마음이 움직이면 된다!'는 걸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피를 나눈 가족, 오랜 시간 알아온 친구, 직장생활을 함께 하는 동료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뿐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선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는 일도 많지만, 이 '사람'들 때문에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지고,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코로나 때문에 촬영 장소를 섭외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지만, 결국 섭외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가를 보여주며 설득하는 방법뿐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