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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Apr 18. 2020

나는 예전과 똑같은 호구가 아니다.

: 그러니까 나는 예전과는 '다른' 호구다.


<드라마 관찰일지> 그 2번째 이야기. 오늘은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한 나의 처절한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다.


드라마팀에 첫 출근을 하고, 일주일 즈음되었을 때 계약서를 받았다. 

영화에서 쓰는 계약서 포맷과는 많이 달랐던 터라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당시 퇴사자들로 인해 시끄러웠던 터라 제작파트인 나까지 '굳이' 묻고 따지고 들지 말자! 싶어 금액만 확인하고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사전에 알고 있던 것보다) 영화와 드라마의 제작파트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접할 때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이니 그저 '감수'하기로 했다.


그렇게 촬영 시작2주 정도 남겨두고, 바야흐로 계약의 시즌이 왔다. 

사실 계약서라는 게 보통 자기 것만 보기 때문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 기준이 없다. 그러니까 다들 똑같은 양식으로 쓴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회사마다, 작품마다 모두 다르니 이곳은 이런 포맷으로 쓰나 보다 싶었던 거다. 그런데 다른 스태프들의 계약서를 확인하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게 됐다. 

다른 스태프들의 계약서에는 52시간 근무와 관련한 명시와 추가 시간에 대한 기준 등이 적혀있었다.


처음엔 혹시 프리 프로덕션(촬영 준비)과 프로덕션(촬영)의 계약서가 다른 건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의 경우, 프리 프로덕션과 프로덕션의 근로시간이 차이가 있어 종종 별도의 계약을 하는 팀들이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프로덕션 계약서를 다시 쓰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런데 대답은 노!!!!!!!!!

영화 제작파트보다는 물론이고, 드라마 연출 파트에 비해서도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인데 추가 근로 수당도 없다고? 이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52시간을 지킨다면 이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정해진 예산 안에서 주 52시간 근로제를 지키면서 '촬영'을 한다는 건 감독과 제작자, 방송사(투자사), 스탭 사이를 오가며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반복해야 한다. 그야말로 피만 안 튀기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도 지키기가 어렵다.


그런데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까지 이 회사의 운영 방식을 지켜본 봐로는 '52시간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은 하지만, 전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지키고자 하는 노오력~이 전혀 없다. 그저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대상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아주 조금이지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였지만, 이 곳 드라마에서 난 막내다. 그래도 이대로 도망갈 수 없는 이상 부딪혀야 했다. 일단은 계란으로 바위를 부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란을 던졌다. 




우선, 정해진 시간 안에서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바뀌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직 안 겪어봤잖아!"

맞는 말이다. 불 보듯 뻔한 일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회사의 기준에 안 맞는 결정은 할 수 없어"

52시간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없고, 일의 효율성마저 지원해줄 수 없다는 건 24시간 중 20시간을 일하는 현장에서 '너 쓰러지기 전까지는 안돼!!'라고 돌려 말하는 거다. 하지만 이 역시 맞는 말이다. 그동안 이 회사는 이런 스타일로 계속해서 일을 해왔다. 여기서 이상한 건 어쩌면 나 하나일지도 모른다. 


"잘못됐다는 걸 알고, 답답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네"

맞는 말이다. 회사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회사의 기준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이 회사를 떠나거나, 이 회사의 기준에 나를 맞춰야 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아주 심플한 거다. 


"추가 근로 수당이 없다면, 정해진 출퇴근 시간과 휴일근로를 보장해주세요" 

나는 분명 미팅 시 주 52시간 근로제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주 52시간이 넘는 근로가 '예상'된다. 

그래서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한 제안을 해보지만 그 조차 수용되지 않는다. OK!! 

그럼 나는 회사의 기준에 맞춰서만 일을 하면 된다. 회사의 기준! 그러니까 내 계약서에는 주 52시간에 대한 명시가 없다. 고로 나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과 휴일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더 많이 일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보다 주 52시간이 넘는 근로를 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뼛속 깊이 새겨진 이 놈의 노예근성 때문에 어떻게든 해 내려고! 더 잘하려고!! 했던 마음이 문제였던 거다. 회사가 나를 배려하지 않는데 왜 나만 회사를 배려해야 하는 걸까? 이제는 나를 회사에서 맞는 사람이 되도록 바꿔야 한다


"너도 우리 팀이잖아."

그러니깐요. 알아서 챙겨주진 못해도 다른 스태프들과 똑같은 권리는 주셔야죠. 저도 여기 팀이잖아요!


"나도 너랑 똑같은 입장이야"

그러니깐요. 그럼 팀의 리더로서 싸울 땐 싸워주셔야죠. 조금이라도 바뀌도록 노력은 해주셔야 부득이한 상황이라고 이해라도 하죠. 


"예산이 없는 거 잘 알잖아"

너무 잘 알죠. 그래서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다같이' 적게 받는다면 저 역시 '감수'하겠지만... 투덜투덜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 주고!! 이런저런 사정을 배려하고, 신경 쓰느라 참고 있으면 그게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건 너무 불공평한 거 같아요.


피디의 입장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섭섭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 입장이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부득이한 상황'이라고 이해할만한 말도 행동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입장을 이해한다고 계속 참다 보면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 호구가 되어버린다. 그러는 동안 내 몸은 지치고, 내 안에 상처는 곪게 된다. 그리고 그 상처가 터지면 그때는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팀, 다른 팀원들에게도 폐를 끼치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가 '사람이 좋아서' 계속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일이 좋아졌다.' 

그래서 시키지 않은 일까지 하고, 내 생활도 없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한다. 

그 과정에서 억울한 일이 생겨도 '굳이 나까지' 잡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나만 좀 참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참고 또 참는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참고 견딘 시간은 당연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그렇게 참고, 열심히 일만 하다 문득 뒤돌아보면 나는 어느새 쉬운 사람 혹은 호구가 되는 거다. 

이 과정을 이전에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니까 비단 드라마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영화도 마찬가지고, 다른 직업들도 겪는 일일 거다. 


영화판을 피해 잠시 이곳에서 쉬다 가려고 했지만 이곳 역시 전쟁터다. 

이 새로운 전쟁터에서 내 위치는 일병이고, 내 옆에는 나를 지켜주는 동료조차 없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내 안전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물론 이러다 생각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또다시 응급실에 누워서 후회하기보다는 조금 미안함을 선택하는 게 지금의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나의 권리와 안전은 나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먼저 지켜주지 않는다.


매일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출근을 하고, 펑펑 터지는 일들을 수습하다 보면 나는 또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다 '이러지 말자''이러면 안 돼'하는 결심을 한다. 

그러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팀원들을 보면 다시 마음이 약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주말인 오늘도 출근을 하지 않겠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커피숍에 나와서 일을 한다.  

그러나 난 예전 똑같은 호구가 아니다. 예전과는 다른 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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