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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May 10. 2020

제작 회계,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제작 회계들을 응원하며!


오랜만에 함께 일했던 제작부장 친구를 만났다. 아니 이제 그는 제작실장이다. 제작부장 경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족하다며 제작실장 자리를 계속 고사하던 그가 드디어 제작실장을 하고 있단다. 

기쁜 소식에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응원에 응원을 건네는 내게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작품은 다시 제작 회계 혹은 회계부장을 하고 싶다는 거다.


이유인 즉, 전작품에서도 회계파트 업무를 배우긴 했지만... 제작실장이 되고 보니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는 거다. 사실 남자 제작팀, 제작부장, 제작실장들의 경우는 헌팅과 촬영 현장을 위주로 경험을 쌓기 때문에 회계파트 업무, 그러니까 <예산>을 배우는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 작품 경력은 많지만 정작 <예산>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예산-MONEY는 정해져 있고, 그 MONEY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 는 연출만큼 좋은 작품을 만드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예산>은 제작파트 일을 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제 갓 제작실장이 된 친구로부터 제작 회계가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처음 제작 회계를 시작할 때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영화에서 첫 발을 디딘 건 10억 미만 영화의 제작 회계였다. 저예산이었기에 딱히 제작팀과 제작 회계 업무의 구분이 없이 촬영이 있을 때는 현장에 나가서 제작팀 일을 했고, 촬영이 끝나면 밤새 그날 사용한 영수증들을 붙이고, 정리하는 게 내 일이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 정신 못 차리고 시키는 일만 하다 보니 첫 번째 작품이 끝났다. 그리고 두 번째 작품에서 다시 제작 회계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제작 회계> 보직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제작 회계는 단순히 영수증을 붙이고, 정리하는 일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영화가 흘러갈 수 있도록 먼저 흐름을 읽어야 하는 보직이었다.


아무리 좋은 영화도, 재밌는 드라마도 MONEY가 없으면 진행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MONEY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촬영'하기 위해서는 먼저 MONEY를 투자사 혹은 제작사에 청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제작 회계는 모든 일정을 알아야 하고, 모든 파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또한 다음 주에 그리고 다음 달에 일어날 일들까지 미리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총알(=MONEY)을 장전하고, 전쟁터(=촬영 현장)에 나갈 수가 있는 거다. 


그렇게 두 번째 작품의 제작 회계 업무를 하면서 전반적인 자금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영화에 대해서 1도 모르던 내가 영화 한 편이 제작되기까지의 세세한 과정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된다면 제작파트를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제작 회계는 한 작품 이상은 꼭 해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작 회계 업무 중 가장 어려운 점은 밤샘이 아니라 단연코 '쓸쓸함을 견디는 일'이라는 것도 알려준다. 내가 제작 회계를 할 시절, 그러니까 라테는 제작 회계를 회계파트 업무를 담당하는 제작팀원으로 생각했기에 당연히 다른 제작팀들과 똑같이 촬영 현장에 나가고, 촬영이 끝나고 제작팀들이 외부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사무실에 들어와 정산을 하고, 다음 촬영을 위한 청구를 했다.


하지만 요즘은 제작 회계를 제작팀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제작팀 일은 분담해서 하는 게 가능하지만, 제작 회계 업무는 제작팀원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 혼자서 정리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작 회계들이 현장에 나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촬영 현장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그날 사용한 영수증들을 정산을 하고, 다음 촬영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몇 개월의 시간을 버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자신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뭘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힘들다. 그러다 보니 제작 회계들의 경우, 촬영 현장에 나가기보다 자연스럽게 '홀로' 사무실에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홀로 사무실에서 산더미처럼 쌓이는 영수증들을 정리하다 보면 수렁과 같은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지금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내가 생각했던 영화 일은 이런 게 아닌데...' 

그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물어 결국 깊은 우울의 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처음 제작 회계를 지원하는 친구들을 미팅을 할 때, 제작 회계를 하고 싶다는 친구들에게 이 과정에 대해 말해주고... 제작 회계는 단순히 영수증만 붙이고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전반적인 영화의 흐름을 배우고, 예산 운영을 서포트하는 보직이며 이후, 제작파트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는 친구들을 보면 안타깝다.




나는 지금 드라마의 제작 회계로 일하고 있다. 드라마는 처음이라 매일매일이 정신없다. 회계파트 일은 지금까지 영화일을 하면서 한 번도 놓아 본 적이 없어서 자신만만했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 회사의 '룰'에 맞추는 일은 해도 해도 어렵기만 하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잘 알서인지 더 힘이 든다.

(제작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제작사는 15년 전 시스템을 운영하며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도 '룰'이라는 이유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3시간이면 끝날 일을 30시간 동안 해야 된다.)


회계업무는 후다닥- 끝내 놓고, 드라마 현장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지켜보려던 호기로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회계업무만으로도 하루가 끝나질 않는다. 그러니까 드라마 현장은커녕 매일 사무실에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일을 하고 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덮쳐오는 쓸쓸함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촬영 현장에 나간다면.... 15시간씩 이어지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결국 나는 내 일(=회계업무)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피해를 끼치게 될 거다. 그래서 지금은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 이 쓸쓸함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 내 위치에서 내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걸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영화&드라마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제작 회계들을 응원한다.

그대들이 하고 있는 일은 결코 단순히 영수증을 붙이는 일이 아니고, 영화&드라마가 원활하게 촬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전쟁터에서 무사히 승전할 수 있도록 총알을 충전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 시간이 결국 토대가 되어 나중에 직접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을 때는 튼튼한 갑옷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쓸쓸함을 잘 견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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