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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Mar 14. 2020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걸까?

: 20대에서 서른의 끝자락까지 오는 동안.


# 20대의 나는

1)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이사를 가야 했을 때

남동생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혼자서 집을 보러 다니고, 이삿짐을 싸고, 용달을 불러 아저씨들과 이사를 했다.

2) 제법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화일로 이직을 하고자 했을 때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지만 연락 오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력서를 넣었던 곳에 전화를 걸어 "아니면 아니다!라는 연락이라도 해 달라" 고 말했다. 그때 전화를 받은 제작실장은 지방으로 확인 헌팅을 다녀오다가 내 전화를 받고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해서 다음날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이사와 이직> 같은 어려운 일도 '혼자서' 척척 해내는 사람이었다.


# 30대의 끝자락에 선 나는 

4년 가까이 쓴 핸드폰이 계속 버벅거려서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뭐가 좋은 건지! 뭐가 나한테 맞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 물어봤지만, 핸드폰은 사양보다는 취향의 문제인 듯 말하는 사람마다 좋다는 게 달랐다. 그리고 구입 방법도 '요즘은 다 비슷하니까 그냥 아무 데나 가서 사도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이는 '그래도 싸게 살려면 일명 '성지'라고 해서 싸게 파는 곳이 있어! 이사하듯이 발품을 팔면 더 싸게 살 수 있어!'라고 말하니 아무리 할부라지만 그래도 고가의 제품이다 보니 '기종도, 구입 방법도' 결정하기가 힘들어서 일주일이 넘도록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핸드폰 구입> 같은 간단한 일도 '혼자서'는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되었다.




# 20대의 나는

별다른 취미는 없었지만, 머리스타일을 바꾸는 걸 좋아했다. 염색은 일 년에 한두 번씩, 안 해본 색이 없을 만큼 후회 없이 해봤고, 일할 때는 숏커트나 단발 스타일을 주로 했지만 쉴 때는 무작정 기르거나 온갖 펌을 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래서 그때는 머리에 쏟아붓는 돈이 많았고, 잘한다는 곳을 찾아 미용실도 수시로 바꾸곤 했다. 그리고 원하던 스타일이 나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불만스러움을 드러내거나 다음날 다른 미용실에 가서 다시 하기도 했다.


# 30대의 나는

기본이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들어 몇 년 전부터 머리색도, 스타일도 그대로를 유지, 미용실도 강남이나 홍대의 비싼 미용실이 아닌  선릉역 언니의 추천으로 성남에 있는 동네 헤어숍을 다니고 있다. 

(이곳에 처음 가면 원장 의 커트에 놀란다. 커트가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 '가위손'의 조니 뎁 느낌? 그리고 셋팅펌도 30분이 채 안 걸린다. 마지막으로 금액이 현금가로 35,000원.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나쁘지 않다는 것!!)


그런데 어제 코로나 때문에 성남까지 가기는 부담스러워서 폭풍 검색을 하고, 무려 45%나 할인을 받고, 15만원이나 내고, 집 근처 미용실을 갔다. 그리고 쌤이 추천해준 일명 아이유 단발펌을 했다. 꽤 긴 머리를 싹둑 잘라냈고,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그런데 거울 앞에는 단발펌을 한 아이유가 아닌 파마머리를 한 동그란 아줌마가 앉아있었다. 놀란 나와는 다르게 쌤은 '너무 잘 나왔다' 말하면서 여러 가지 스타일이 가능한 머리라며 몇 가지 노하우를 더 말해줬고, 나는 맑은 웃음과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남기고 미용실을 나왔다.


20대의 나는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 기분을 생각하느라 다른 사람의 기분을 배려하지 못했다.

30대의 나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자리에서 표정을 드러내기보다 '아이유 단발펌을 한다고 해서 내가 아이유가 되는 건 아니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기분보다는 3시간 동안 고생한 쌤의 기분을 더 배려하게 되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걸까?


20대에 나는 서른의 끝자락 즈음되면 모든 걸 척척- 해내는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20대에 척척- 해내던 일들도 서른의 끝자락까지 오는 동안 갈팡질팡 조심스러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투덜 불평불만하기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20대에서 서른의 끝자락까지 오는 동안 용기는 사라졌지만, 배려를 배워가고 있다.

내가 생각했던 30대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쁘지만은 않다.

다가오는 40대 역시 내가 생각했던 모습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잃어버리는 것만큼 얻는 것도 생길 테니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유 단발펌은 죄가 없다. 단지 내 얼굴과 매칭이 안 맞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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