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어제 잔뜩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대를 벗어나니 배가 고팠다. 휘리릭~ 먹을 것이 있나 뒤적거리다 오래전에 사둔 누룽지를 발견하고, '창난젓'은 없지만 일단 보글보글 끓는 물에 누룽지를 던져놓고 <나 혼자 산다>를 틀었다. 그렇게 후루룩~ 후루룩~ 누룽지를 먹으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낄낄~ 웃고 있는데 함께 일하고 있는 라PD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
"어? 피디님! 무슨 일 있으세요?"
처음엔 TV 소리에 라PD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TV 소리를 줄이자 라PD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제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어요.
라PD는 차분히 조금 전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일명 몹씬(mob scene : 군중 장면) 촬영으로 지방에 내려와 있는데... 촬영 현장에 도착하니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고, 이런 상황은 그녀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FD들이 현장 진행을 하고, 제작팀은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변수가 많은 드라마 현장은 영화 현장처럼 많은 준비를 하고 진행하기보다는 절대적인 필요조건들만 있으면 '일단' 진행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 부분들을 해결한다.
촬영이 시작되자 라PD는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들이 터지기를 기다리기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제들에 대해서 다른 PD들에게도 이야기를 했단다. 그때였다. 옆에서 라PD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PD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네가 뭔데 우리를 가르쳐?"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네가 그렇게 잘났어? 우리가 다 바보처럼 보여?"
제PD는 라PD보다 직책이 높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라PD 역시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그렇게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던 두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말들까지 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 제PD는 라PD를 현장에서 OUT 시켰단다. 현장에서 빠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화가 나지만... 막상 이대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전화를 한 것이다.
"저는 잘해보려고 한 건데... 제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어요."
라PD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9년 전의 내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내가 따악- 서른이 됐을 무렵. 그러니까 내가 첫 제작실장을 하게 됐을 때- 나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촬영 현장은 좋지 않은 상황들이 계속됐고, 그런 와중에도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데, 힘듦을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풀던 라인 피디가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새벽부터 세팅을 하고 있는데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라인 피디가 다짜고짜 나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듣다보니 당시 내 담당이 아니던 파트에서 작다면 작은 실수가 있었는데... 그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려던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고- 우리 둘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꺼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중재시키던 제작 피디가 나에게 일단 숙소에 가 있으라고 하면서 싸움은 끝이 났다.
촬영현장에서 벗어나 제일 먼저 내가 한 일은 병원에 가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링거를 맞다보니 일이 힘든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이런 상황까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숙소에 가서 짐을 챙겨 부산역 앞에서 1시간여를 더 고민했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를 탔고, 처음으로 하고 있던 작품을 스스로 그만뒀다.
라PD와 제PD의 싸움을 듣다 보니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됐는지 '상황'만 두고 생각하면 여전히 나는 잘못한 게 없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알게 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내 '상황'뿐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상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내가 힘든 것만 생각하느라 라인 피디가 힘든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 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힘들었던 것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때의 라인 피디 역시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PD인데 '왜 그렇게밖에 못하는지'. 라인 피디가 잘못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화'만 냈을 뿐이었다. 물론 밑에 사람이 윗사람의 힘듦까지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 내가 라인 피디에게 '사과'할 시간을 줬더라면 어땠을까?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로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나도, 그때의 라인 피디도 우리 모두가 미숙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잘못한 게 없어. 하지만... 누구에게나 안 좋은 상황들이 연거푸 일어날 때가 있다.
사실 이번 주는 제PD에게 유독 힘든 한 주였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소한 일이 점점 커지면서 큰 실수가 되었고, 가장 인정받고 싶은 상사로부터 엄청 깨지고, 자신의 부족함에 좌절했다. 그 와중에 건강까지 나빠져 병원을 다니는 등 몸도 마음도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생채기가 가득 난 상황에서 마음을 다 잡고 촬영현장에 왔는데... 함께 일하고 있는 친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네가 다 잘못했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아 참고 버티던 마음이 '팡-'하고 터져 버린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힘든 상황이라고 해서 그 '화'를 다른 사람에게 풀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분명 제PD가 잘못한 게 확실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안 좋은 상황들이 연거푸 일어날 때가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사람마다 뭘 해도 잘 안 되는 시기가,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늪에 빠지는 것처럼 상황이 나빠지기만 하는 그런 날들이 있는데 지금이 제PD에게는 그런 시간들인 거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잘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서로의 '타이밍'이 어긋나면서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었고,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것이다.
"너는 잘못한 게 없어. 하지만... 누구에게나 안 좋은 상황들이 연거푸 일어날 때가 있잖아. 지금 제PD를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제PD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사실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 두 사람을 지켜보는 '제삼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라PD는 갑자기 튄 불똥에 뜨겁고 아프겠지만... 이미 받은 상처가 없던 일이 되지는 않겠지만... 자신을 '제삼자'라고 생각하고, 제PD의 '상황'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면 그래도 조금은 이해가 되진 않을까?
물론 아무리 '제삼자'가 '당사자'에게
'제삼자'의 입장으로 지금의 '상황'들을 떨어져 생각해보라고 한들
'당사자'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안다.
어쩌면 라PD는 오늘 일로 이 작품을 하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라PD에게 여러 이야기들을 했지만, 결국 '제삼자'일뿐 그들의 앞으로의 관계는 각자가 선택할 몫이다. 하지만 나도 겪어봤던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상황이 안타깝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뭘 해도 안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언제든 지금의 라PD가 제PD의 상황이 되는 날이, 제PD가 라PD의 상황이 되는 날도 있을 거다.
그때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 나를 먼저 이해해주려는 사람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함께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건 '좋지 못한 상황에서 남을 먼저 이해하는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