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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Oct 30. 2022

느린 초격차

과학과 에세이

속도는 속력일까 방향일까.


몇 해 전, 수능 때였다. 자리에 앉았더니 앞사람 등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었다. 유명한 특목고 이름이었다. 100분이 주어지는 수학 과목 시간, 그 사람 맡에 놓였던 시험지는 절반인 50분도 채 안 되어 호기롭게 덮였다. 포기가 아닌 이미 다 풀었다는 여유로움의 표시로서.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게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란 거야.

그리고 그때, 만 19년 짧은 인생에서 처음 느꼈다. 초격차라는 게 생각보다 근처에 흔했다는 걸.


초격차의 시대다. 기업부터 개인까지, 이 시대에선 엄두도 못 낼 만큼 격차를 내야 한다. 어느 하나 시작하기 겁난다. 앞선 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할까 봐 주저하게 된다. 빈부격차랄까, 어느새 머리 집단은 쭉쭉 뻗어가고 꼬리 집단은 축 처져간다. 그사이 중간을 이어 줄 몸통만 황량하다. 어떻게 해서든 몸통까진 들어가 버텨봤지만, 그럼에도 머리는 너무나 빠르게 성장해댔다.


애써봤다. 그래서 알게 됐다. 애써도 안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알게 됐다. 애쓰는 방식이 잘못됐다는 사실도. 속도의 의미를 돌이켰다. 속도의 정의는 1초 동안 이동한 거리다. 아무리 빨리 치고 나간들 뫼비우스의 띠마냥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이동한 거리는 0일뿐이고. 그렇게 속도도 0이 된다. 반대로 갔다면 되려 마이너스의 속도가 되겠다. 속도는 속력과 방향이 섞인 벡터인데, 방향을 뒤로한 채 여간 속력의 크기만 바라봤다. 빠른 게 멋있었고 빨라야 우월한 줄 알았으니까. 빠르면 다들 부러워했으니까.


여행에는 목적지가 있지만, 인생엔 목적지가 없다. 그래서 인생을 여정이라 한다. 그리고 여정 길엔 방향이 전부다. 목적지가 없는데, 굳이 서둘러 떠날 이유는 없다. 반대로 목적지가 없는 만큼 순간순간의 방향은 소중해진다. 느려도 격차를 낼 수 있다. 뒤따름이 아닌 방향을 살짝 튼다면, 날마다 격차를 내며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나만의 방향으로 향하는 느린 초격차가 완성되어 간다.


여느 때처럼 한밤에 대로 옆을 걸으니 반대편에서 차 한 대가 무섭게 달려왔다. 눈을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차 소리는 이내 등 뒤로 멀어졌고. 무서울 만치 빨랐던 차도 지나고 나니 내가 가는 방향에선 그저 반대로 가기만 했다. 그 사람의 빠른 앞길이 나에겐 역주행. 그 무서웠던 속력이 내겐 그저 점점 느려지는 속도일 뿐이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나랑 다른 방향을 향하는 사람의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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