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현 Oct 30. 2022

아주 작은 것들의 힘

과학과 에세이

깜빡 잠에 들었나 보다. 눈을 떴을 땐 목적지에서 한참을 지난 어느 낯선 동네인 걸 보니. 분명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볼륨 높인 이어폰으로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한 번씩 조는 일이 있더라도 늘상 집 근처에서는 눈이 떠졌는데, 그런 여유조차 챙길 정신이 다 떨어진 순간이었나 보다.


가만 돌아봤다. 며칠간 밥을 있는 대로 대강 먹었던 날이 잦았다. 미뤄둔 설거지와 빨랫감들은 애써 무시한 채 지내기도 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아무것도 안 하려 했더니, 정말 무엇 하나 티끌만치도 하고 싶지 않았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얼른 다음 날이 오길 바랐다.


열심히 굴러다녔다. 이따금 비틀대도 나름 균형을 잘 잡아 왔다고 여기며 굴러다녔다. 하지만 직감 비스름한 게 말했다, 이번엔 그리 가볍지 않을 거라고. 올 것이 왔나 보다 했다. 누구에게나 불현듯 찾아와 꼭 한 번씩은 괴롭히고 간다는 시기가. 번아웃이니 슬럼프니 저만치 여러 단어로 형용되는 무기력의 순간이. 열심히 지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껏 날 이끌어주던 그 열심이 빚어낸 무기력감이라 외려 무겁기만 했다.


작지만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손을 깨끗이 씻고 화려하진 않지만 시간 들여 정성껏 상을 차렸다. 쌓아뒀던 설거지를 마치고 가벼운 운동을 했다. 묵혔던 빨래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서랍에 방치돼 있던 유산균도 오랜만에 챙겨 먹었다. 사소한 일들을 차례로 해내고 나니, 덧없던 마음도 어느새 한풀 꺾여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손을 놓았던 노트에 펜으로 몇 자 적어내었다.


작아도 아주 강한 것이 있다. 몸 안엔 미생물이 39조 마리 정도 있단다. 조그맣다 못해 미약할 정도로 작아서 이름조차 미생물인데, 미생물은 자기 상태에 따라 내 건강부터 기분까지 멋대로 이리저리 기울인다. 크기만 컸지 연약한 사람은 미생물에게 면역력을 기댄다. 강한 척했지만,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작은 것들에 많은 것들을 기대며 살았다.


아주 작은 것들의 힘을 믿는다. 언젠간 지나갈 일순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지나갈 시간. 작은 것들은 시간을 빠르게 지나가게 해주기도 한다. 이따금 지난할 무렵엔, 작은 일들을 하며 보낼 것을. 포스트잇을 살짝 떼어 적어둔다.

작가의 이전글 잘 살아내겠단 주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