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지식의 나무 part.2
가장 보편적인 대답은 우리의 언어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한된 개수의 소리와 기호를 연결해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무한한 개수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주위 세계에 대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소통할 수 있다. (p. 46)
> 우리가 벌써 잘 알고 있듯이, 사람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정보를 저장하는 것, 그리고 소통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간단한 정보쯤은 전달할 수 있다. 사람의 언어가 동물의 언어와 첫 번째로 다른 점은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동물의 언어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동물의 언어가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바이트(byte) 수준이라면 인간의 언어가 담아낼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테라바이트(terabyte)쯤 되지 않을까.
> 학생들 중에는 영어 공부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 중 대부분은 영어 낱말 외우기가 너무 힘들고 귀찮다고 한다.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다는 것이다. 영어 공부를 한동안 열심히 하다가도 그것 때문에 그만 지쳐버린다. 낱말 하나하나는 나름의 정보를 담고 있다. 외워야 할 영어 단어가 그렇게나 많은 이유는 영어라는 언어가 그만큼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걸 좀 더 넓게 생각해보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나아가서 그 언어가 정보를 나누고 정리하는 체계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언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몸짓 언어-소리 언어-글자 언어가 그것이다. 아마 이 셋 중에 몸짓 언어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람이 아닌 동물들만 봐도 여러 가지 몸짓과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기분을 드러낸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그 동물의 몸짓 언어를 알아먹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한다. 아마 사람 종도 아주 먼 옛날에는 다른 동물들과 비슷하게 몸짓 언어로 소통했을 것이다. 지금도 몸짓이나 표정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소통의 도구이다.
> 사람 종을 포함한 영장류에게는 몸짓 언어 중에서도 특히 '털고르기'가 중요했다고 한다. 털고르기는 서로가 서로를 가깝고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행동이다. 자신의 몸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상대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털고르기를 받으면 마사지를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질 텐데, 그러면 털고르기를 해준 상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 '동물의 왕국'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침팬지나 고릴라가 서로 털을 골라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같은 무리 안에 있는 영장류 개체들은 일대일로 돌아가면서 털고르기를 해주었다. 오래 전의 사람 종도 다른 영장류처럼 서로 털고르기를 해주면서 좋은 감정을 확인하고 더 쌓아갔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사람들이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표현하고 그에 대해 반응해주는 것도 털고르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그런데 몸짓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몸짓 언어는 상대 앞에서 직접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멀리 있는 동료에게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동물들은 소리로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한 가지 소리에 한 가지 뜻을 담기로 약속하면 멀리 있는 동료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오해의 소지 없이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 사피엔스가 글자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다. 그 일은 소리 언어로 담아내기 힘든 뜻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정보를 좀 더 넓은 시공간에 있는 이들에게 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사피엔스가 깨달은 다음에 일어난다.
두 번째 이론 또한 우리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으로서였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전달할 가장 중요한 정보가 사자나 들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중략)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중략)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략) 소문은 주로 나쁜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언론인은 원래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었고, 언론인들은 누가 사기꾼이고 누가 무임승차자인지를 사회에 알려서 사회를 이들로부터 보호한다. (pp. 46-48)
> <사피엔스> 책이 우리나라에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뒷담화 이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사실, 바로 뒤에 나오는 '허구적 실체(fictional entity)'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한데, 사람들은 이 '뒷담화하는 능력'에 더 주목했던 것 같다. 아마 '뒷담화'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에 끌렸던 게 아닐까 싶다.
> 언어는 그저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 교수가 말하듯, 사람의 언어는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서 아주 많이 발전했다. 사람은 소리 언어를 가지고 자기 눈 앞에 없는 동료에게 생각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앞서 말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눈 앞에 없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눈 앞에 있는 동료에게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누가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조금만 생각해보면, 뒷담화 능력은 참 특이하고 대단한 능력이다. 눈 앞에 없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주워들은 것을 기억해서 이야기한다는 점, 자신이 떠올린 뒷담화의 내용에 따라 그 뒷담화를 전할 사람을 고르고 고른다는 점 때문이다. 이걸 다 해내려면 두뇌가 꽤 많이 발달해야 할 것 같다. 다른 동물들의 두뇌는 뒷담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다. 당장 우리가 자주 마주하는 개나 고양이가 뒷담화를 한다고 상상하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 뒷담화는 그저 소문과 정보를 전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뒷담화를 하고 나면 서로 비밀을 공유하고 있으니 더 가깝고 친하다는 느낌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A는 B를 만나 C에 대한 뒷담화를 한다. A는 나중에 C를 만나 B에 대한 뒷담화를 한다. B는 또 C를 만나 A에 대한 뒷담화를 한다. 뒷담화의 내용에는 좋은 이야기도 있고 나쁜 이야기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나쁜 이야기를 할 때 더 짜릿한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 유발 하라리 교수가 다른 인간 종들은 이 '뒷담화 능력'이 없어서 무리의 크기를 더 키우지 못했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뒷담화 능력은 사피엔스가 끈끈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대의 사피엔스들도 뒷담화를 하면서 느끼는 짜릿함을 즐긴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나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뉴스의 대부분은 뒷담화이다. 그리고 다시 그 뉴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욱 친해진다.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중략)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중략)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 호주 원주민의 드림타임(시공간을 초월해 과거-현재-미래가 하나로 존재하는 장소 - 옮긴이) 신화,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pp. 48-49)
> '뒷담화 능력'은 나중에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발전했다. 뒷담화 능력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라면,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세상에 없는 걸 지어내서 말하기'라고 할 수 있겠다. 사피엔스는 이제 경험한 적이 없는 걸 경험한 것처럼 지어내고, 지어낸 것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믿기까지 한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사피엔스의 언어가 가진 가장 특이한 점이다. 또한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사피엔스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 사피엔스는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온갖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나는 오래 전의 사피엔스들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납득하고 싶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는 이유는 호랑이에게 쫓긴 남매를 하늘의 신이 데려가 해와 달이 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어떤 절 마당에 아주 큰 나무가 자리잡게 된 것은 오래전 어떤 스님이 거기에 나무로 된 지팡이를 꽂았기 때문이다.
> 사피엔스는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지어낸 이야기에다가 가치관을 담아내기도 한다. 이제 이야기는 단순히 흥밋거리가 아니라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르는 기준을 세워주기까지 한다. 이야기로 인해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이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같은 경계선 위에서 살아간다.
> 이야기가 그어놓은 경계선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기준을 주기 때문이다. 이 기준은 예의범절, 가치관, 커뮤니티 센스, 관습, 규범, 도덕, 윤리 등등으로 불린다. 사람들은 이 기준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그 기준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기준이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다른 마을에는 다른 기준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그런갑다'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기준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