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지식의 나무 part.3
자연상태에서 전형적인 침팬지 무리의 개체수는 20~50마리다. 집단 내 개체수가 늘어나면 사회적 질서가 불안정해지고 결국에는 불화가 생겨서 일부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다. 동물학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1백 마리가 넘는 집단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서로 다른 무리들은 거의 협력하지 않으며, 영토와 먹을거리를 두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아마도 이와 유사한 패턴이 원시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하는 초기 인류의 사회적 삶을 지배했을 것이다. (중략)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이들 원시인류의 사회성은 서로 친밀한 소규모 집단에만 적용되었다. (p. 51)
> 침팬지, 오랑우탄, 보노보 같은 유인원이 사는 모습을 보면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 일어나기 전에 인간 종이 어떻게 살았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인간 종의 동물들도 침팬지처럼 20~50명 정도가 한 무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정한 영역 안에서 이동생활을 했을 것이다. 번식이 잘 되어서 100명 넘어갈 정도로 무리가 커지면 몇 명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무리를 나가서 자기들만의 무리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 우리는 살면서 아주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친구가 20-30명씩 자동으로 생긴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학교생활을 12년 한다고 치면 친구가 수백 명이 된다. 학원을 다니거나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하면 친구를 더 많이 사귈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온라인으로도 친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래서 20-50명하고만 평생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하면 왠지 답답하게 느껴진다.
>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진심으로 의지하면서 마음을 터놓는 사람은 가족 포함해서 몇 명 되지 않는다. SNS 친구는 수백 명쯤 되어도 정작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는 금방 다 셀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옛날에 아주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도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의 집합'에 그 사람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하지만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온갖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보다는 오히려 수십 명 정도와 가깝게 지내는 모습이 사피엔스에게 더 잘 어울릴 수도 있다. 사피엔스의 관계지능은 수렵채집하던 시절의 그것에 멈춰 있는데, 문명만 너무 크고 복잡해졌다. 보통의 많은 사피엔스들은 현대의 문명에 억지로 적응하려다가 인지과부하(cognitive overload)에 걸리거나 우울증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
> 지금의 사피엔스는 수천, 수만 명이 함꼐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5천만 명이나 된다. 우리나라에는 수백만 명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사는 큰 도시도 여러 개 있다. 그런데 지구에 있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인구수는 그리 많은 편도 아니다. 이만큼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산다는 것은 인지혁명이 일어나기 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지혁명에 뒤이어 뒷담화이론이 등장한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더 크고 안정된 무리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뒷담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과학적 연구 결과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는 약 150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50명이 넘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알고 지내며 효과적으로 뒷담화를 나눌 수 있는 보통 사람은 거의 없다. (p. 52)
> 수많은 인간 종의 동물들 중에서 사피엔스만이 언어를 좀 더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인지혁명 덕분이다. 사피엔스는 뒷담화를 할 수 있게 되고 나서 150명까지 한 무리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사피엔스는 다른 인간 종의 동물들보다 더 큰 무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인간 종의 무리와 싸우면 사피엔스가 이길 확률이 훨씬 높아졌다.
> 150명을 '던바의 수'라고 부른다. 로빈 던바라는 진화심리학자가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이 150이라는 숫자를 밝혀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던바의 수' 개념은 이어지는 연구로도 계속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던바의 수' 개념은 사람이 문명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150이라는 숫자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던바의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지는 '던바의 윤리'나 '던바의 가치관' 같은 것들이 수천 년동안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 <사피엔스> 공부하면서 '던바의 수'와 관련된 개념들을 많이 다루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의 3부까지는 이 '던바의 수'를 중심으로 책을 이해할 수 있다. 1부부터 3부까지는 '던바의 윤리'가 자라나고 깊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이 개념을 잘 기억해달라고 부탁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이 결정적 임계치를 넘어 마침내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대 국가, 중세 교회, 고대 도시, 원시부족 모두 그렇다. (p. 53)
> 사람 언어의 세 가지 특성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첫 번째는 동물들의 언어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정리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뒷담화(gossip)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특성만 있었다면 사피엔스는 고작 150명짜리 공동체만 만들어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피엔스는 아주 오래 전부터 150명이 넘게 모여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바로 사람 언어의 세 번쨰 특성인 '허구를 만드는 능력' 덕분이었다.
> 앞서 말했듯, '허구를 만드는 능력'도 따지고 보면 '뒷담화 능력'과 큰 차이가 없다. 같은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뒷담화할 수 있다면, 아예 세상에 있지도 않은 무언가를 지어내고 그 무언가에 대한 뒷담화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두고 뒷담화를 하면서 친해지듯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도 같은 '허구'를 믿는다는 이유로 힘을 합쳐 함꼐 일할 수 있다.
>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와 과 일본 축구 국가대표가 경기를 할 때, 한국팀이 일본팀보다 전력이 약할 때조차도 우리는 한국팀을 응원한다. 전력을 분석해서 '일본팀이 이길 것 같아'라고 합리적으로 예측을 해도 일본팀을 응원한다고 욕을 들을까봐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꺼내지도 못한다.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허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