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꽤 오랫동안 청소년들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수업을 해왔다. 웬만한 청소년들은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수행평가, 독서기록장, 자기소개서 등등 글 쓸 일이 자꾸 생기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글쓰기를 많이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시간도 많이 잡아먹고, 뭐라고 써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꾸역꾸역 글을 쓰긴 했는데 영 만족스럽지는 않고, 남 보라고 글을 쓰다 보니 왠지 부끄럽고. 글을 쓰면 쓸수록 이런 기억만 쌓이니 우리 아이들은 글쓰기와 점점 멀어져간다.
세상에 글쓰기 방법이나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들은 엄청 많다. 교보문고 같은 큰 책방에 가면 책꽂이 하나가 글쓰기 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청소년들과 함께 읽으면서,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고 글을 더 잘 쓰기 위한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만큼 좋은 책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눈팅만 하는 독서모임 대화방이 하나 있다. 그 방에서 누군가 글쓰기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이 책이 항상 추천 리스트에 들어 있어서 관심이 생겼다.
나는 이 책의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자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어 글로 써내라는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주 큰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쳤다. 책에는 4-5페이지 남짓 되는 짧은 글이 40개 정도 실려 있었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글 한 편 한 편에 담긴 내용도 여러번 곱씹을 만했다. 다만 글들이 실려 있는 순서나 체계가 따로 없었다. 되는대로 쓰고 되는대로 실어놓은 것 같았다. 책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책 전체의 뼈대를 잡아보았다.
① 나에게 딱 맞는 글쓰기 도구 갖추기(필기구나 컴퓨터)
② 글 쓰기 좋은 시간과 장소 찾기
③ 글감 생각해보기 - 너무 거창한 거 말고 가까운 것들부터 써보기, 글감 노트 만들기
①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가리지 않고 바로바로 써보기
② 글쓰기는 육체노동이다 - 매일 일정한 시간을 글쓰기에 투자하기 → 글쓰기 체력 기르기
③ 눈치보지 말자 - 자기 안에 있는 편집자이든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이든
① 자세하게 묘사하기
② 자신의 어두운 면, 약점, 감추고 싶은 부분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③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보기 - 다 됐다 싶을 때 진짜 다 썼는지 생각해보기
① 고쳐쓰기
② 글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
③ 서로의 글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
④ 글과 자신을 나눠서 따로 생각하기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글을 처음 써보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안내가 될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글쓰기를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도록 돕는 것 같아서이다. 청소년들에게 글을 써보라고 하면, 거창하고 멋있게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마음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 그 청소년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모습을 많이 본다. 그런 부담 다 걷어치우고 가까운 것부터 마음편하게 가리지 않고 써보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글쓰기가 육체노동이라는 것을 지적해준 점도 아주 좋았다. 글쓰기를 정신적인 활동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읽고, 쓰고, 고쳐야 한다.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이나, 컨설팅 보고서를 쓰는 컨설턴트나, 서면을 준비하는 변호사들을 보면 글 한 편 쓰느라 녹초가 되는 경우가 많더라.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에 드는 글을 쓰려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글쓰기 연습을 하면서 글쓰기 체력을 길러놔야 한다.
아쉬운 점도 있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분명 다르다. 말하기는 표정, 목소리, 말투 등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반면 글쓰기는 말하기보다 훨씬 틀을 잘 갖춰야 한다. 표정, 말투, 목소리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할 때는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낱말을 써야 하고, 문법도 잘 지켜야 한다. 글 전체적인 구조도 튼튼하게 잡혀 있어야 한다.
말은 한 번 뱉고 나면 사라져버리지만, 글은 한 번 써놓고 나면 계속해서 고쳐나갈 수 있다. 글을 고치는 일은 글을 고치는 자신이 글을 썼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된다. 글을 고치다 보면, 자신이 그 때는 왜 그렇게 글을 썼어야 했는지 돌아보기도 하고,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자신을 나무라기도 하기도 하고, 글에 담긴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서 한 층 더 깊은 아이디어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말하기 수준에 멈춰 있는 사람보다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글쓰기는 크게 학문적인 글쓰기와 문학적인 글쓰기로 나눌 수 있다. 학문적인 글쓰기를 할 때는 무엇보다 학문 개념과 일상 언어를 잘 구분해야 한다. 학문 개념을 쓸 때는 개념의 뜻을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게 번역을 잘 해서 쓰거나 원천 언어를 같이 적어주거나 해야 한다. 문학적인 글쓰기는 학문적인 글쓰기보다 한 길 더 어려운 것 같다. 학문 개념을 일상 언어로 풀어서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글쓴이의 언어 감각이 아주 세밀해야 한다. 수준 높은 문학책일수록 쉬운 글에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는 말하기에서 글쓰기로 넘어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나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책만 읽고 글쓰기 방법을 다 배운 것처럼 생각하면 큰 코 다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시키는대로 연습을 어느 정도 하고 나면 수준 높은 고전이나 문학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그야말로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는 글을 맛보면서, 글을 읽는 눈높이와 글을 쓰는 가치관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