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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징쌤 Dec 17. 2020

[연재] 청소년을 위한 <사피엔스> 댓글 달기 (9)

2장. 지식의 나무 part.6

게놈 우회하기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신화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로 신화를 바꾸면 인간의 협력방식도 바뀔 수 있다. 상황이 맞아떨어지면 신화는 급속하게 바뀐다. (중략) 그 결과 인지혁명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필요의 변화에 발맞춰 행동을 신속하게 바꿀 수 있었다. 이것은 유전적 혁명이라는 교통체증을 우회하는 고속도로, 즉 문화혁명의 길을 열었다.] (p. 60)
[사회적 행태의 심각한 변화는 일반적으로 유전적 돌연변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중략) 우리가 아는 한, 사회 패턴의 변화, 새로운 기술의 발명, 새로운 주거지에의 정착은 문화가 개시한 일이라기보다는 유전자 돌연변이와 환경의 압력에 따른 결과였다. 인류가 이런 단계를 거치는 데 수십만 년이 걸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p. 61)   


> 유전자의 진화는 아주 느리다. 그래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유전자의 차원에서만 비교하면, 구석기시대의 사피엔스와 지금의 사피엔스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지금의 사피엔스를 구석기시대에 갖다 놓거나, 구석기시대의 사피엔스를 오늘날로 데려와도 겉보기로는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구석기시대 사피엔스가 살아가는 모습과, 오늘날의 사피엔스가 살아가는 모습은 천지차이이다.


> 유전자의 진화만 있었다면, '사회 패턴의 변화, 새로운 기술의 발명, 새로운 주거지에의 정착'처럼 우리 삶을 크게 바꾼 일들은 유전자의 진화의 속도에 맞춰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고향인 아프리카 중부 지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50명 정도의 작은 무리만 이루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 호모 솔로엔시스, 호모 에렉투스, 베이징 인, 자바 인 등등의 다양한 사람 종(species)들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 인지혁명이 일어난 덕분에 사피엔스는 문화적 진화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이제 사피엔스의 삶이 달라지는 속도는 유전자의 진화의 속도를 아주 크게 앞서고 있다. 그래서 '게놈 우회하기'가 가능해졌다. 사피엔스는 인지혁명을 거치면서 언어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언어로 허구적 실체(fictional entity)를 짓는다. 허구적 실체를 바탕으로 천 명, 만 명이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 종은 물론 사람 외의 다른 동물들은 이 일을 해낼 수 없었다.



[대조적으로, 사피엔스는 인지혁명 이래 행태를 신속하게 바꾸고 새로운 행태를 유전자나 환경의 변화가 없이도 미래 세대에 전달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가톨릭 신부, 불교의 승려, 중국의 환관처럼 아이를 갖지 않는 엘리트가 계속 등장했던 것이다. 이런 엘리트의 존재는 자연선택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에 모순된다.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아이 낳기를 기꺼이 포기했으니 말이다. (중량) 다시 말해서, 원시인류의 행동 패턴이 수십만 년간 고정되어 있던 데 비해 사피엔스는 불과 10년 내지 20년 만에도 사회구조, 인간관계의 속성, 경제활동을 비롯한 수많은 행태들을 바꿀 수 있었다. (중략) 이것이 사피엔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요인이다.] (pp. 62-63)   


> 생물이 살아가는 목적은 번식이라고들 한다. 생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매미는 번식을 위해서 7년을 땅 속에서 애벌레로 보낸다고 한다. 암컷 사마귀는 짝짓기를 하면서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는다. 연어는 알을 낳기 위해 바다에서 강 상류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때 텔레비전으로 보던 동물의 왕국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아니, 새끼 좀 낳으려고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 나는 아기를 낳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나에게는 번식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인 것 같다. 물론 집값이나 양육비, 경력단절 걱정 같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나아지면 출산율은 다시 높아질 수도 있다. 말하자면, 사피엔스는 상황에 따라 생물로서의 번식 본능을 이겨내고 다른 무언가를 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아이 낳지 않기를 선택하기도 했다. 주로 성직자들이 그랬다. 이들은 일반적인 가족관계에서 벗어난 대신, 종교의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고 경전에서 시키는 대로 경건하게 수행해서 사회의 엘리트가 되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실체에 따르면, 그들은 자식을 낳지 않는 대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생물학적 욕구를 이겨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신기한 일이다.



[교역은 매우 실용적인 활동, 허구적 근거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활동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사피엔스 외에는 교역을 하는 동물이 없고, 우리가 상세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피엔스의 교역망은 모두 픽션에 근거를 둔다. 교역은 신뢰 없이 존재할 수 없는데, 모르는 사람을 믿기는 매우 어렵다. 오늘날 전 지구적 교역망은 달러, 연방준비은행, 기업의 토템적 상표와 같은 허구적 실체들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p. 64)   


>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싸우거나 서로를 죽이지 않고 필요한 물건만 주고받고 헤어지는 건 무척 신기한 일이다. 동식물의 세계를 보면 보면,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아주 특수한 경우 아니면, 싸우지 않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사피엔스는 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건을 교환하는 일까지 해낸다. 왜냐하면 사피엔스는 '모르는 사이'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 물건을 사고팔 때는 허구적 실체가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돈과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이 과정에도 사실은 많은 허구적 실체가 심어져 있다. 물건을 팔려면, 그 물건을 일단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거나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는다고 해서 그 물건이 팔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 물건을 사러 올 사람들이 어떤 허구적 실체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좋아하는 물건이 달라질 것이다.


> 뿐만 아니라 그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주 간단한 기술일지라도, 거기에는 많은 허구적 실체가 숨겨져 있다. 돌을 깎아 손도끼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복잡한 허구적 실체들을 알아야 한다. '돌은 단단하다', '돌을 깎으면 날카로워진다', '돌을 깎으려면 그 돌을 깎을 만큼 강한 물건이 필요하다', '날카로우면 더 강한 무기가 된다', '돌도끼에 나무로 손잡이를 만들어서 묶으면 더 쓰기 편할 것이다' 등등, 아무 데나 떨어져 있는 돌을 주워서 쓰는 것이랑 비교하면 생각할 게 훨씬 많다.


> 손도끼보다 더 복잡한 물건을 만들려면 훨씬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매일 같이 스마트폰을 쥐고 살지만, 그 물건을 만드는 데에 어떤 기술이 쓰였는지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스마트폰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한 사람이 다 외운 다음, 혼자 힘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스마트폰 하나 만들려면 각각의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을 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이 많은 기술자들을 한 팀으로 묶으려면 그들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허구적 실체가 필요하다.


> 물건을 파는 대가로 받는 돈에 그 물건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도 허구적 실체 덕분이다. 돈이 있으면 처음 만나는 사람, 말이 안 통하는 사람, 피부색이 다른 사람, 종교가 다른 사람과도 어렵지 않게 소통할 수 있다. 뒤에 나오겠지만, 돈이야말로 사람이 만들어낸 온갖 허구적 실체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또한 사피엔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


> 학생들과 <사피엔스>를 읽기 한참 전에 <설탕의 세계사>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그 책에서 사람들이 교역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잠깐 엿본 적이 있다.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만들면서 유럽-아프리카-카리브해 사이에 '삼각무역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이 세 지역은 언어, 문화, 종교, 역사, 전통이 다 다르다. 하지만 이 세 지역의 상인들은 자신이 돈을 내는 만큼의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서로에게 품고 있다. 그러니 싸우지 않고도 교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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